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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lovewithbiglust2 2024.06.01~2024.09.26

lillovewithbiglust 2024. 12. 1.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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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 진료 기록. 2주간 별 일 없이 잘 지냈는지? 잘 지냈다. 다만 추석에 시골에 갔다가 서울 올라오는 버스에서 공황발작이 왔다. 숨이 잘 안쉬어지고 이인증. 유체이탈 한듯 멍하고 얼얼한 느낌. 비상약이 있어서 먹었는데도 한동안 힘들었다. 한 알로 안돼서 연달아 두알을 먹어야 했다. 먹은 즉시 증상을 잡아주는 약이 있으면 바꾸고 싶다. 지금 비상약은 태옥씨가 경대병원에서 처방받던 것과 동일하다. 종류나 용량을 바꾸기 보다 그런 증상이 올 때 처음부터 두알씩 먹어보는 것도 방법이다. 그 외에는 별다른 일 없었는지? 첫 일주일 라투다 먹었을 때는 기간이 짧아서 그런지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주수가 늘어나니 확실히 비정상적으로 들뜨는 느낌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손떨림도 있다. 심하지는 않다. 충동적으로 뭔갈 한적은 있는지? 그런 적은 없는것 같다. 돈을 많이 쓰거나 누굴 갑작스레 만나거나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 다만 들뜨는 기분 때문에 스스로 조심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자 의사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항우울제는 우울증을 치료하는 약인데 왜 부작용에 자살시도가 있을까요? 간단하다. 항우울제는 의욕저하와 자살생각을 동시에 낫게 하는데 의욕저하가 먼저 치료된다. 자살생각을 계속 갖고 있는데 저하됐던 의욕이 나아지면 어떻게 하겠나. 올라온 힘을 갖고 자살시도를 하는거다. 그래서 항우울제 부작용에 자살시도가 있다. 지금 드시는 라투다도 비슷하다. 조울증 약은 기본적으로 위에서 낮추는 힘과 아래서 끌어올리는 힘 두개가 동시에 작용한다. 라투다는 그중에서 아래서 끌어올리는 힘에 초점을 둔 약이고 먼저 작용한다. 그래서 약을 바꾸거나 처음 먹어보면 들뜨거나 비정상적인 에너지를 경험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두 힘 간에 밸런스가 생긴다. 기분변화가 위험할 수도 있으니 가족이나 지인에게 약 바꾼 것을 알리고 행동에 변화가 있는지 잘 봐달라고 알려야 한다. 그래도 지금이 정상적인 치료기인 것은 맞다. 다만 충동적인 생각이 들 때는 바로 행동에 옮기지 말고 여러번 꼭 생각해야 한다. 라투다 계속 먹어보되 지금 취침전에 드시고 계신 것을 저녁으로 시간을 당기자. 기분조절에 좀더 효과가 있을 것이다. 2주 뒤 다시 뵙자. 복용시간에 변화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2주를 유지하는 것 같다. 그렇게 오늘 진료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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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해도 달에 열여섯편 이상은 내 몸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것 같다. 너무 많은 정신적 자극은 나를 기묘한 탈진 상태에 놓이게 한다. 또 어떤 영화는 보고 나면 몸이 정말로 아프다. 카를로스 사우라의 「까마귀 기르기」를 보고 온 날 밤에 나는 실제로 열이나고 이유없이 아팠다. 이 또한 좋은 경험이라 생각한다. 다만 내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좀 덜 허약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의연했으면 좋겠다.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태연자약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강인함과 건강함을 갖고싶다. 영화 한 편 한 편을 전부 열병처럼 앓아버리면 이 짓을 도저히 지속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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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를 이해해야 사랑도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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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혀가 우리 누나를 임신시켰다니까?
이우진의 자지가 아니라, 오대수의 혓바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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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것(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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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것(있으면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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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위드자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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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평생이 타인에게 책 한 권만큼,
아니, 문장 하나 만큼의 가치를 갖기도 어렵다는 생각.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떠오르는 한 사람.
내 인생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사람.
내 정신의 모든 구석구석에 아로새겨진 사람.
내 모든 가치관과 사랑에 대한 생각의 분기점인 사람.
나보다 중요한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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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까지는 관여하지 않겠다던 당신이었으나 불행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기에 우리의 사랑에는 희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 이응준, 홀로 있는 자정의 괘종시계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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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이 객관적으로 보기에 불행한 편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타인이 구태여 확언하는 말을 하는 것은 무신경한 일이다. 당사자가 ‘나는 불행하다’고 말한다 해서 타인이 아무 때나 ‘그는 불행하다’고 말할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당사자가 그 말을 할 때에는 그것이 자기 직시의 효과를 발휘해 자신의 현재를 극복하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겠으나, 타인이 그런 말을, 그것도 그를 그 불행에서 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의사도 없이 할 때는, 그런 말이야말로 그가 미래의 다른 자신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꺾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 삼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불행이 맞는지 아닌지, 어떤 종류의 불행인지, 불행의 원인은 무엇인지 말할 필요도, 말할 권한도 없다. 그저 들어주거나, 외면하거나 두가지 선택지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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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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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출산이야말로 극한의 나르시시즘 같다. 자기 자신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분신을 기어코 세상에 내놓겠다는 다짐이, 생살을 찢어 그 행위를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내겐 전혀 숭고하지 않고 괴이하고 의아하게 생각된다. 자기가 무어가 그리 사랑스럽고 대단해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아이가 사랑의 결실(섹스의 결실)이라든가 망해가는 결혼을 구원해보기 위한 수단이라든가 부모가 자기만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이른바 자기들의 실존적 구멍을 채우기 위해, 그러니까 자기 구멍을 채우려다 실패해서 하나 더 만든 구멍이 아기라고 하는 부모는 차라리 내게는 의도는 불순하되 정상 수준으로 느껴진다. 자신을 꼭 닮은 존재를 갖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나는 순수한 의구심과 공포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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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 내 자신을 견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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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소설 읽다가
‘가늠할 수 없는 안부들을 여쭙니다’라는 문장이 너무 좋아서 기록해둔다.
한 사람의 안부는 다른 사람이 쉽게 가늠할 수 없고, 가늠해서도 안되는 것이라고
마음에 다시 새겨넣는다.
내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안부를
물어보고 싶은, 그러나 물어볼 수 없는 사람이 여럿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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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편견은 한 집단의 사상보다 언제나 심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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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더 사랑하지만 책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것 같다. 나는 언제 책을 읽나. 나만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을 때 책을 읽는다. 생각의 비좁음을 느낄 때. 그 비좁음에서 답답함을 느낄 때. 영화도 얼마간 내 인식을 확장해주는 측면이 있지만 즐거움을 위해서 찾을 때가 많고 책은 이렇듯 절박한 필요에 의해 찾게 되는 것이니 책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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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고 있는 글. 자기가 뭘 보여주고 싶은지 정확히 알고 있는 영화. 창작자의 확신이 텍스트와 이미지를 뚫고 섬광처럼 뿜어져 나오는. 이런 작품에 나는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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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꿈 같고 저게 현실 같다.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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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했고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후회했으나 어쩔 수 없었고
죄 사함 같은 거 믿지도 않으면서
기도를 무슨 몹쓸 습관처럼 중얼거렸고
단 한명의 인간을 사랑했고
인간이라는 종 자체는 경멸했고
그 무엇보다 스스로를 경멸했다고
그래서 늘 쓸쓸했다고
이따금 발작처럼 행복하고
오래된 버릇처럼 불안했다고
지독한 어둠에 살아서
한줄기 빛에도 오래 감동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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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진리는 마음 아픈 사람의 방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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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절박해서 글을 쓸 때는 언제나 버리기 위해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느낌을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느낌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느낌과 나를 분리하기 위해. 느낌을 버리기 위해. 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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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올라가는 버스에서 공황발작이 올 조짐이 보여서 음료수와 함께 급하게 비상약을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지금은 손발이 좀 저린것 제외하면 별다른 증상 없다. 멍하다. 문득 모든 게 너무 힘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하고. 불안이 올까 불안하고. 불안을 기다리다 불안해지고. 모든 게 너무 힘겹고 무거운 무게로 나를 짓누른다. 모든 게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살할 수밖에 없게 태어나는 사람도 있는것 아닐까. 아무리 정교한 기계도 불량품 한두개 정도는 찍어낼 수 있는 거니까. 나도 그런것 같다. 애시당초 살 수 없도록 그러니까 자살하도록 태어난 것 같다. 모든 게 내 자살을 종용하는것 같다. 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분이라 했으니 내가 자살할 것도 처음부터 알고 세상에 내놓은 것일테고(전지) 내가 자살한다면 막을 힘도 가지고 있었으나 막지 않은 것이 된다(전능). 그러니 내가 자살한다 해도 나를 탓하거나 벌하면 안된다. 나를 벌하는 순간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게 되니까. 또는 전지전능하되 악한 품성을 갖고 있는 것이 되니까. 머릿속으로 나를 한강물에 처넣고 끈으로 목을 매고 번개탄을 피우고 면도칼로 손목을 죽죽 그으며 몇번이고 죽였더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 언제고 죽을 수 있다. 치오란의 말마따나 자살에 대한 생각만이 나에게 진정으로 위안을 준다. 우습게도 자살에 대한 가능성이 나를 살게 한다. 자살이라는 희망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전에 자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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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싫다 서울
여기 내 행복 다 있는데 가서 뭐하나
마음 너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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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 art piece is just to remind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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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에 슬픔을 느낀다면 그 이유는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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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 사랑한다. 덕배도 사랑해.
그런데 이들 사랑하는 만큼 내 자신을 사랑해보고 싶다.
누군가를 죽을만큼 사랑한다거나 누군가를 위해 죽을수도 있다고 말할 때 나는 내 말의 진위를 의심한다.
그들을 그만큼 사랑하는 건지
나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 건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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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 진료 기록. 일주일간 라투다 먹어봤는데 좀 어떤지? 복용기간이 짧아서 아직은 효능이나 부작용은 잘 못 느끼겠다. 다만 손떨림이 조금 생겼다. 심하거나 자주 그렇진 않다. 아빌리파이나 라투다 같은 계열의 약은 그런 부작용이 조금씩 따라오긴 한다. 붕뜨는 기분은 없는지? 붕 뜨는 건 잘 모르겠다. 다만 리튬 데파코트 먹었을 때와 같은 가라앉음은 없다. 라투다가 그런 가라앉음에 특히 효과를 보이는 약이라 그렇다. 인데놀 먹어봤는지? 먹어봤다. 손떨림이 심하다면 같이 처방해줄 수 있다. 일상이 불편한 정도는 아니라 여기서 약을 더 늘리고 싶지는 않다. 알았다. 일단은 약 종류나 용량은 유지하고 심한 부작용도 없는 것 같으니 2주 더 먹어보고, 괜찮으면 4주로 천천히 늘려나가자. 추석에 특별한 계획 있나? 시골에 갈 것 같다. 혹시 시골에 가면 감정적으로 영향 받을 일이 있나? 잠시 생각한 뒤 별다른 일은 없을것 같다고 했다. 추석 잘 쇠고 2주 뒤 뵙자. 그렇게 상담은 끝났다. 약국 가는 길에 처방전을 보니 질병 기호가 바뀌어있었다. 경상대병원에서 내게 주었던 질병 기호는 F318(양극성 정동장애, 양극성 2형 장애). 여기서 내게 준 질병 기호는 F313(양극성 정동장애, 현존 경증 또는 중등도의 우울증)과 F410(공황장애 우발적 발작성 불안). 조증은 관해 상태로 보는 걸까? 우울증 쪽으로 치료를 해보려는 시도인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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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형태에 대한 생각ㅡ좋은 영화는 의미나 메시지를 갖기 전에 제대로된 형태부터 가진다.
대중영화에 대한 생각ㅡ대중영화는 대중을 바보 취급한다. 너희는 대중이고, 대중은 이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 영화 너머로 이런 은밀한 모멸을 읽어내지 못하면 범죄도시 같은 영화를 보면서 웃게 되는 거다. 기분이 나빠야 한다. 대중에게 아무런 기대도, 이해를 구하지도 않는 그런 작품이 대중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전달하기 어려운 것을 어떻게든 전달해보려고 심오한 내용과 형식을 동원하는 그런 영화는 오히려 대중을 믿는 거다. 대중을 믿기 때문에,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감각을 대중이 지녔다고 믿기 때문에 상업적 실패를 무릅쓰고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전달하려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화면에 대한 생각ㅡ화면 구성에 있어서 영화가 지켜야 할 두가지. 첫번째, 필요한 것만 담을 것. 두번째, 내러티브와 화면이 조응할 것. 이 두 가지를 지키고도 좋지 않은 영화는 있지만, 이 두 가지를 지키지 않고 좋은 영화는 없다.
영화의 해석에 대한 생각ㅡ언제부턴가 영화는 감독이 숨겨둔 의미 찾기, 수수께끼, 암호풀이가 됐다. 그런 식으로 기능하는 영화도 물론 있지만 영화의 본 기능이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 그것은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오독이라는 생각. 영화는 예술이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을 담고 있을 때조차 언제나 예술이었다. 지나친 해석 놀이는 결국 이야기와 이미지, 사운드로서의 영화라는 예술을 과학으로 받아들이는 풍조.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
질문과 대답에 대한 생각ㅡ대답보다 질문으로 가득찬 화면이 많을 때 그 영화가 흥미로워진다는 생각. 대답하는 만큼은 감독의 몫이고 질문하는 만큼은 관객이 가져가는 몫이다.
상징에 대한 생각ㅡ좋은 영화는 상징을 ‘잘’ 활용하고, ‘남발’하지 않는다. 상징의 남발은 직설적 표현에 자신이 없거나, 생각의 빈약에서 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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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정전 이후로 왕가위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모두 하나 같다. ㅡ 엇갈림, 비밀, 그리고 평생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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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슬프고, 탈진, 탕진.
답답하다. 멍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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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얼마나, 뭘, 더, 내려놓으라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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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어.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버렸어.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만들어 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수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 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줌까지도 허공에 돌려주려는 듯 말야.
/나희덕, 허공 한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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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선 너같은 사람을 가리켜 아귀라고 해.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귀신.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구렁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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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 그 자체보다, 불행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럽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든 불행에서 의미를 찾으려 헤맨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 (욥30:20-24)
자신의 불행이 단지 우연의 결과라는 사실에서 오는 허무함은 견디기 힘들다. 차라리 이 모든 일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섭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낫다. 신은 그때 비로소 탄생한다. 고통의 무의미 속에서, 그 숨막히는 허무함 속에서 인간은 숨을 쉬기 위해 신을 발명해낸다.
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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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이 쉽게 지날 줄 알았는데 영원할 수도 있더군요.
/아비정전 소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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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지 않아도 기억은 시간과 함께 부지런히 썩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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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최승자, 20년 후에, 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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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똑똑한데, 똑똑하지 않은 척을 한다.
너는 무신경하지 않은데, 부러 무신경한 척을 한다.
무얼 위해서?
너무 많이, 깊게 보는 스스로의 눈이 두려워서.
외면하고 싶어서.
그러나 그건 너의 귀중한 능력이란다.
버린다고 버려지지 않고
가지고 싶다고 가질 수 없는.
그러니 외면하지 마.
너의 슬프고 깨끗한 눈을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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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지은 죄 뿐만 아니라 내가 당한 죄에 대해서도 유죄인가? 하는 물음이 가장 견디기 힘든것 같다. 자기불신과 자기혐오에서 오는 끝없는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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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스 메카스 편집 ‘흘끗 봄(Glimp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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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울고 있어요
멀쩡해보이지만 속으로 비명 지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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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정에서는 폭력의 집행자였고, 국가에 의해서는 폭력의 희생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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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진료 기록. 집이랑 가깝다. 건대역 바로 앞이라 접근성이 좋다. 시간 맞춰 도착하고 간호사 안내 받아 문진표 작성. 이 짓을 또 하는구나 라는 생각 잠시. 원장실로 안내 받아 삼십여분 가량 상담했다. 기분이나 증상보다 약 조절 위주로 얘기했다. 리튬, 데파코트 먹어봤는데 온 몸이 무겁고 가라앉는 기분 거기에 더해 대사문제로 힘들었다. 그러다 교수님이 마지막으로 먹어보자 한게 카바마제핀이었는데 별다른 부작용이 없어서 몇년간 꾸준히 먹어왔다. 의사가 카바마제핀은 백혈구 감소라는 치명적인 부작용 때문에 대체제가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쓰는 약이고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추세라고 했다. 나는 조울증약을 먹으면 무조건 정기적으로 피검사를 받아야하는줄 알았는데 카바마제핀의 이 백혈구 감소라는 부작용 때문에 받아왔다는 걸 오늘에서 알았다. 그러면서 라투다라는 약을 먹어보자고 했다. 리튬 데파코트 카바마제핀 모두 기분조절제로서 조울증에서 특히 조증을 잡는 역할을 한다. 라투다는 항정신병제로서 조울증에서 특히 우울증에 효과를 보이는 약이다. 미국에서 개발되어 우리나라에 들어온지 한달된 신약이다. 소아에게 처방할만큼 강하지 않은 약이고 리튬 데파코트에 있던 대사문제나 카바마제핀의 백혈구 감소같은 부작용이 거의 없다고 알려져있다. 입에서 선뜻 알겠다는 말이 안나왔다. 오랜 조절 끝에 어렵게 정착한 약이고 여태 별다른 부작용 없이 먹어왔다, 약조절을 할때마다 항상 두려움과 좌절을 느꼈다, 또 나에게 맞는 약을 찾아 실험을 해야 하는구나, 이 짓을 다시 해야 하는구나 하는… 이렇게 말씀드렸는데 의사가 나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카바마제핀은 장기 복용에 적합한 약이 결코 아니다. 결국 라투다를 먹어보기로 했다. 일단 일주일치 먹어보고 내원한 뒤 괜찮으면 기간은 서서히 늘려가자. 자몽이나 자몽주스는 먹으면 안된다고 한다. 이유는 못들은것 같다. 상담 막바지에 의사가 갑자기 지난 일을 자주 후회하냐고 물어봤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럴것 같다고 답했다. 의사는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내가 그때 했던 선택 외에 다른 선택은 하기 어려울거라 했다. 당시에 했던 선택도 치열한 고민 끝에 자신에게 최선인 선택을 한 것일테니까. 그리고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는 사이드미러에 가림막을 하고 운전을 하는 것과 같다.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는 여러가지 선택지가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시야가 좁아져서 선택지도 줄어든다. 그러니 극단적인 기분이나 충동이 들 때는 일단 선택을 유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병원으로 전화하거나, 응급실을 가거나. 알았다고 했다. 팔목의 상처를 보고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오늘 진료는 끝났다. 새로운 약을 먹어야 하고, 적응기간을 갖느라 당분간은 1주에 한 번 내원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모든 게 다시 시작되는 기분이다. 두렵기도 하고 좌절감도 들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하다. 잠을 못 자서 피곤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오전에 비가 왔는데 놀라울 정도로 날씨가 선선하다. 여름이 갑자기 지나가버린 것같다. 한 해가 또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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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은 자신이 속할 사회를 선택한다.
그러고는 문을 닫아버린다.
/에밀리 디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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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냉기, 다음에는 혼미, 그러고는 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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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 2024 시네바캉스 막바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 회로를 보고왔다. 공포영화가 기본적으로 공포라는 장르에 충실하면서도 사회적 현상과 인간 심리에 대해 이렇게 심도있게 접근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짧은 소견에 느꼈다. 영화가 끝나고 김성욱평론가의 시네토크도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고독과 죽음은 선고되었고 그것은 한번 시작되면 돌이킬 수도, 막을 수도 없고, 인간과 인간은 영원한 단절. 살아서도, 심지어 죽어서까지. 여기까지가 내가 받았던 인상인데 김성욱 평론가는 이것을 유예와 체류의 시간으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죽음은 물론 예고되었고, 그것을 인간의 힘이나 의지로 막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지만 그래도 잠깐이나마 그 사이(삶과 죽음)에서 체류하는 시간을 갖자. 조금은 나아가자. 어차피 죽음은 닥칠테지만. 좋은 평론은 영화의 장단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해석의 지평을 넓혀주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영화의 끝에 이르러 검은 얼룩이 되어 사라져가는 카와시마의 곁에서 미치가 한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저는 지금 최후의 친구와 함께 있어요. 저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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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 방향으로 가는 7호선 건대입구 역사에 쓰인 시. 바삐 가던 걸음을 늦추고 항상 읽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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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에 차서 나는 알아요 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혼란스러운 눈을 하고 나는 몰라요 라고 말하는 사람. 알려고 알려고 갖은 노력 끝에 자기만 들을 수 있는 한숨처럼 모르겠다는 말을 내뱉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에게 정말이지 순수한 호기심과 깊은 매력을 느낀다. 그건 조심성이나 자신감 결여, 무지와는 아무 상관 없고 생각의 깊이에서 나오는 것 같다. 답이 아니라 질문의 깊이. 어떻게 답할 것인가에 골몰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질문을 할 것인가에 골몰하는 사람. 또한 자기 생각에 이미 완결성을 갖춘 사람과 무슨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며 대화를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건 대화가 아니라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의 강연이나 연설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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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든 사람이든 사물이든 한 번 호불호의 마음을 정한 것은 좀처럼 돌려지지 않고 스스로조차 질릴 만큼 확고부동한 것이 내 단점 같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은 내가 완만해서 곁에 두기 좋다고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 관심사를 벗어난 것에 대한 극도의 무신경과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일단 호불호 검사를 마친 것에 대해선 타협에 일말의 여지도 없을 만큼 완고하다. 그래서인지 한 번 좋다고 생각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결점이 있어도 무시하고 스스로를 속여가며 좋아하고 한 번 싫다고 생각한 것은 내 인식 속에서 그것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릴 정도로 극도로 싫어하는 것 같다. 그리고 둘 중에서 굳이 따지자면 불호의 고집이 훨씬 센 것 같다. 호의 고집이 변질된 적은 종종 있어도 불호의 고집이 변질된 적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 내가 모든 면에서 나와 정반대인 K를 그토록 아끼는 것 아닌가 싶다. 처음에 우리 둘은 서로를 본능적으로 싫어했다. 당시 내 머리 속엔 K에게 불호라는 말뚝이 박힌 상태였다. 아직도 생각해보면 우스운 몇 개의 사건을 통해 나는 K를 좋아하게 되었고 지금은 K와의 술자리를 가장 재밌어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호불호를 바꾼 유일한 사람(불호에서 호가 된)이어서. 내가 가장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하게 해준 사람이어서. 그래서 그 애를 아끼고 여러해가 흘러도 여전히, 앞으로도 계속 그 애 옆에 있고 싶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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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선에서 말이 안 통하는 사람보다 자기 잘못을 그럴듯한 개소리로 교묘하게 포장하는 사람이 더 싫다. 전자는 구제가 되는데 후자는 평생 그렇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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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바람은 꼭 가을 바람 같았다
한 해가 지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This is how you open a movie

오프닝 시퀀스는 감독이 앞으로 펼쳐질 영화에 대해 관객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다. 오프닝 시퀀스가 훌륭한 영화가 모두 명작은 아니지만 명작은 모두 훌륭한 오프닝 시퀀스를 가진다. 오프닝은 단순히 영화에 대한 흥미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관객에게 앞으로 영화 속에서 펼쳐질 이야기의 골조가 되는 분위기와 색조를 제시하고 감독의 경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크나이트의 오프닝 시퀀스는 굉장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시퀀스의 시작에서 영화는 고층빌딩이 즐비한 도시를 익스트림 롱 샷으로 보여주며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이 될 장소를 제시한다. 시계 초침 소리처럼 빠른 박자의 불안한 음악이 고조되며 화면은 수많은 빌딩 중 하나의 특정한 빌딩으로 줌 인 된다. 15초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이 샷은 단숨에 관객들을 영화에 몰입시키고, 줌 인된 빌딩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견을 통해 긴장감을 가져다준다. 다음 샷에서 빌딩의 창문 중 하나가 깨지고 화면은 기괴한 가면을 쓰고 무장한 남자를 보여준다. 이 영화가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범죄’에 관한 영화가 될 것이라는 소개를 인상깊고 흡입력 있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화면이 전환되고 카메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관객을 등지고 구부정하게 서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풀 샷으로 비춘다. 카메라는 시퀀스 시작, 고층빌딩을 익스트림 롱 샷으로 보여준 뒤 서서히 줌 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의 뒷모습을 풀 샷으로 보여준 뒤 서서히 허리춤으로 줌인하며 남자가 왼 손에 들고 있는 기괴한 가면을 보여준다. 이 가면은 빌딩 내부의 남자들이 썼던 것과 유사해 보인다. 이러한 화면적 연출과 카메라 움직임의 유사성을 통해 관객은 이 남자가 중요한 인물이며, 빌딩 내부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범죄에 연루된 인물이라는 정보를 습득한다. 그리고 화면은 다시 전환되어 다른 건물로 로프를 연결해 이동하는 범죄자들의 모습을 처음과 마찬가지로 익스트림 롱 샷으로 보여주는데, 버즈 아이 뷰 앵글을 채택하여 로프 아래로 도시의 전경을 작게 비추며 범죄자들의 행위를 반대로 위험하고 심각해 보이게 한다. 여기까지가 영화가 시작한 지 불과 50초가 지난 시점이다, 50초! 단 50초 만에 관객은 영화에 몰입함과 동시에 앞으로 자신이 관람하게 될 영화의 중요한 정보를 매력적인 방식으로 습득한 것이다. 이 50초의 신을 위해 감독은 화면에 관련한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산했을 것이다. 가령, 감독은 고층빌딩을 익스트림 롱 샷으로 찍어서 하나의 창문으로 줌 인 하는 대신 처음부터 하나의 창문을 클로즈 업으로 촬영했을 수도 있다. 가면을 든 조커의 뒷모습 또한 몸 전체를 풀 샷으로 찍고 가면으로 줌 인 하는 대신 조커의 머리, 구부정한 등, 손에 든 가면의 순서로 하나하나 클로즈업 한 뒤 분할된 샷으로 보여줄 수도 있었다. 범죄자가 로프로 이동하는 장면도 익스트림 롱 샷과 버즈 아이 뷰 앵글로 촬영하여 로프 아래 전경을 보여주는 대신 범죄자만 화면에 가득 차게 촬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관객은 감독의 가장 멋진 초대장을 받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찍을 것인가. 유능한 감독은 이렇게 질문하는 대신 다음과 같이 질문할 것이다. 어떻게 ‘흥미롭게’ 찍을 것인가. 유능한 감독은 불과 몇 초에서 몇 분에 달하는 모든 샷을 이처럼 치밀하게 계산하고 다분히 의도된 방식으로 촬영한다. 시퀀스 처음 고층빌딩을 익스트림 롱 샷으로 촬영했던 것과 반대로, 마지막에는 가면을 벗은 조커의 얼굴을 화면 가득 클로즈업 촬영하는 것으로 5분 남짓한 오프닝 시퀀스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단 5분만에 관객은 벌써 영화에 완전히 빠져들었으며,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 대해 흥미와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세상에 도시를 배경으로 한 범죄 영화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치밀하고 계산적으로 설계된 멋진 연출의 범죄 영화는 많지 않다. 특히 초대장부터 이렇게 훌륭한 영화는 더더욱. 일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이 초대장을 열어본 관객이라면 그의 초대를 거절하려야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는,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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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썼던 글을 읽으면 그때나 지금이나 혼란스러운 것은 똑같지만 그때는 혼란 속에서 뭔가 건져내고 이해해보려는 힘 같은 게 느껴진다면 지금은 체념의 상태 같다. 나는 혼란스럽고, 혼란스러운 채로 내버려두기로 했고, 일종의 포기 상태.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프다. 그런데 이해하려는 시도는 그보다 더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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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막으려는 힘과 일어나려는 힘이 있다는 것. 아무리 막아도 일어날 어떤 일은 일어난다는 것. 할머니 죽음이나 내 자살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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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힘든 일을 이해하려 할 때 취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는 것인데, 이건 오해의 일종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보다 위험하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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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가해자 대다수가 중고딩이라는 거 보고 확신함
대한민국 사회는 아들을 인간으로 키우는 것에 완전히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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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건축, r&d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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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성’을 주제로 한 이번 서울아트시네마의 시네바캉스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유령에 관한 영화들을 계속해서 보다 보니 유령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다정하고 슬픈 어떤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에서 유령을 다루는 방식. 유령은 환영이나 미신의 영역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가정하고 바라보면 사실 더 생각할 거리가 없다. ‘유령성’이라는 말과 유령성을 주제로 한 영화에 대한 고찰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유령이 아니라 ‘유령성’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영화에서 유령이 갖는 성질이나 기능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그러면 영화는 유령을 어떻게 사용할까. 현실과 생각의 간극.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의 간극. 사람의 심리는 그 간극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어떤 감독들은 이런 사람의 심리를 유령의 성질을 빌려 표현한다.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람은 아닌 것. 실제인지 아닌지 모호한 것. 까마귀 기르기에서 주인공 아나는 대낮에 자기 자신의 유령을 본다. 그 유령은 죽고자 하는 자신의 소망을 투영한다.앙젤리카의 이상한 사례에서 주인공 이작은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죽은 여자가 미소 짓는 것을 보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기독교와 유태교, 삶과 죽음, 옛것과 새것. 그의 삶에 가득한 간극. 그는 죽음으로 이 간극과 화해한다. 팬텀 스레드에서 주인공 레이놀즈는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그녀의 유령을 본다. 그는 자신의 누이에게 말한다. 죽은 자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져. 난 그게 전혀 오싹하지 않아. 안녕, 용문객잔에서 영화가 시작한지 40분만에 처음 등장하는 대사는 다음과 같다. 이 극장에 유령이 나온다는 걸 아십니까? 그리고 카메라는 폐업을 앞둔 극장의 관객들을 유령처럼 비춘다. 화려한 멀티플렉스가 생겨난 후 더이상 찾는 이가 없는 옛 극장의 관객들은 살아있지만 유령같은 존재다. 영화감독 올리베이라는 영화 자체가 유령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영화는 비물질적이야. 그것은 유령이지. 영화가 유령을 생각하고 사용하는 방식은 단순한 환영이나 미신의 영역이 아닌 인간 심리나 존재를 투영하는 거울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소재다. 내가 바라보는 현실과 실제 사이 간극.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의 간극. 그 간극에서 유령이 생겨난다. 무언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그것이 존재하길 바라는 염원일 수도 있다. 유령이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 난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마음을 살아본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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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습관을 반복하듯 나는 창밖의 어둠을 응시한다. 그대는 묻는다. 왜 어둠을 그리도 오래 바라보냐고. 나는 답한다. 그것이 어둠인 줄 몰랐다고.
/심보선, 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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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겠지만 전 행복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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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부모의 증상이다.
 
 

Brown Bunny

구조: 오토바이시퀀스(1차탈주시도) - 바이올렛(꽃이름 - 데이지 대체1) - 소금밭시퀀스(2차탈주시도) - 릴리(꽃이름 - 데이지 대체2) - 로즈(꽃이름 - 데이지 대체3) - 환영의 데이지 결국 만나지만 마지막 탈주 실패
기억에 남았던 장면: 소금밭 롱 샷
영화 관통하는 원형의 이미지: 오토바이 레이스처럼 라인을 따라 끝없이 반복해서 돌고도는 것
그렇게 긴 펠라치오 씬이 필요했던 이유?
의식을 잃은 상태서 강간 당하다가 구토로 질식사한 여자에게 또 다시 자기 성기를 입에 물려준 것 - 도돌이표 원형, 굴레 - 주인공은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 - 맨 처음 오토바이 시퀀스에서처럼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돌겠지
 
 

 

규릴ㅏㅇ 대화

- 그래서 나는 그냥 그렇게 간단히 정리했어
- 니가 믿니?
- 뭘?
- 니가 쓴 문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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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직 할머니를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할머니는 나를 위해 자신을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든다
나는 오직 할머니의 행복을 바란다
그런데 할머니는 나를 위해 불행을 자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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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슬픔 속에는 불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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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청했습니까, 창조주여, 흙으로 나를 인간으로 빚어 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끌어올려 달라고?
- 실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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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타인에게 원하는 건 잘 측정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것
나도 당신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고 당신도 나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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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적 거리면서 겨우 한 슬픔에서 다른 슬픔으로, 한 이별에서 다른 이별로 옮겨가는 것만이 삶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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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랑 한날 한시에 죽고싶다
그것 말고는 인생에 원하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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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떠나는 사람의 짐가방을 닫아주는 것까지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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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 맘보
언컷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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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
오늘 영자원에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관람하러 다녀왔다.
너무 멀어서 웬만하면 가고 싶지 않은 곳인데 꼭 보고 싶었던 영화라 어쩔 수 없이 다녀왔다.
두시 정도 집에서 나오니까 세시 반 영화에 여유롭게 입장할 수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영화관에서 보리라는 다짐으로 아껴두고 있던 영화였는데 이렇게 보게 되어서 정말 좋다. 멀리까지 달려온 보람이 있다.
누군가의 악몽 속에 들어갔다 나온 느낌. 혹은 정신착란을 겪은 느낌.
아주 매력적이고 환상적인 방식으로...
두시간 반 동안 현실과 따로 떨어져 완전히 다른 세계에 갔다온 것 같다.
영화에 이야기의 뼈대가 되는 하나의 구축점이 없다는 것이 신선했고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인물이나 이야기들이 서서히 얽혀가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인물의 클로즈업을 번갈아 보여주는 방법으로 화면에 일촉즉발의 긴장감과 신비함을 조성하는 방식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정성일 평론가가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보고 '21세기 영화 시대가 시작됐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떤 까닭에서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도 같다. 20세기 영화가 빈틈없는 논리로 내러티브의 모든 부분이 정확한 설명이 가능하다면 21세기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논리나 설명을 거부하고 직관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데, 그런 면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뻔뻔한 작품이 이 작품이어서 그렇게 말한 것 아닐까 싶다.
하여튼 올해 여태까지 약 80편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관람하였는데 영화관에서 보기 잘한 작품을 꼽으라면 이 작품을 1위로 칠것 같다.
그래도 영자원엔 웬만하면 안 가고 싶다. 왔다갔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고등학교 자퇴하고 매일같이 영자원에 출근하다시피 할 때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하남에서.
열정도 늙고 몸도 늙어서 힘들다 이제.
아, 그리고 오늘 상영관에서 박찬욱 감독 봤다.
평상복 차림에 마스크 낀 은발의 중년 남성이 희한하게 포스가 있어서 봤더니 박찬욱 감독이었다.
그 조그마한 체구 어디서 그런 포스가 뿜어져나오는지 모르겠다.
영화 끝나고 나서는 30분 정도 걸려서 광화문에 갔다.
좋은 기운과 성실한 사람들로 가득한 곳.
곧장 교보문고로 가서 원래 사고 싶었던 책을 한 권 샀다.
로베르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라프에 대한 노트」.
삶과 영화에 대한 브레송 감독의 짤막한 메모들을 옮겨놓은 책이다.
사월 즈음 서아시에서 브레송 감독의 「아마도 악마가」라는 영화를 봤었다.
보고난 직후에는 사실 큰 인상도 없었고 내 마음에 이렇다 할 파동이 없었다.
오히려 좀 비난하고 싶었던 마음조차 있었다. 철지난 허무주의를 떠들고 있구나, 하고...
그런데 점차로 어떤 장면 하나가 내 마음에 끈덕지게 남아서 사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하루에도 몇 번이고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이 참으로 이상했다.
거의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내가 이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인지 이 이미지가 나에게 집착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미지에서 놓여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 이 이미지가 나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기 때문에 그토록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규리에게 추천받았던 타르콥스키 책을 검색해보던 중에 연관 도서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내가 느꼈을 기묘함이 짐작이 가겠지.
나는 별 것 아닌 것도 미신적으로 풀이하는 여자라 이 발견이 어떤 계시처럼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오늘 멀리까지 나간김에 곧바로 서점에서 사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는 오랜만에 세연이와 안부 전화를 하고 오월에 발매된 빌리 아일리시의 정규앨범을 들었다.
그러다 핸드폰이 꺼져서 강제로 책을 좀 읽었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서 피시방에 갔다.
다행히 티원 경기 마지막 세트는 챙겨볼 수 있었고, 서너판 정도 게임을 했다.
잃어버렸던 양산도 찾았다.
처서가 다가와서 날씨도 그리 덥지 않았다.
좋은 영화를 봐서인지, 읽고 싶었던 책을 구매해서인지, 오랜만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어서인지.
티원이 경기에서 이기고 플옵 진출을 확정지어서인지, 잃어버렸던 양산을 찾아서인지.
버스에서 들었던 빌리 아일리시의 노래가 좋아서인지, 서대문 근처를 지나며 보았던 나무들이 예뻐서인지.
아니면 유독 멋진 こもれび를 보아서인지. 혹은 내가 그것이 멋지다고 생각해서인지.
오늘은 참으로 괜찮은 하루였고, 그 넉넉했던 기분을 잊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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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
며칠 전 광훈이오빠랑 안부차 전화를 했다.
세달 전 마지막으로 연락하고 오랜만의 통화였다.
둘 다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오빠는 늘 비슷한 일상을 안정적으로 살고있고 난 늘 안정적으로 불안정하고 하릴없이 영화나 보러다니니 말이다. 우리 대화는 늘 내 인생에 일어난 크고 작은 이벤트가 주제였는데 지금 나는 이벤트를 극단적으로 회피하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요즘 오빠는 무슨 거래처 사장 딸이랬던가 하여튼 여자를 만나고 있다고 했다. 가슴이 아주 크다고 했다.
만나는 여자의 젖 크기로 십여분 가량 떠드는 오빠의 말을 듣고 있자니 좀 서글퍼졌다.
나도 저 나이쯤 되면 인생에 재미난 일이 별로 없어서 만나는 남자의 좆 크기나 얘기하게 될까.
하긴 저 나이쯤 되어서도 인생에 꿈과 사랑과 고민과 극적인 이벤트들이 넘쳐난다면 그것 또한 정상적인 상황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게 다일까?
내가 하는 일과 만나는 사람 그것 말고도 뭔가 더 있을 수 없을까?
나흘 전 명동으로 「그린 나이트」라는 영화를 보러 다녀왔다.
주인공 가웨인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녹색 기사의 머리를 베고 명예와 재물을 얻는다. 단, 정확히 1년 후 크리스마스에 똑같이 자신의 머리를 내어주는 조건으로.
가웨인은 조건을 받아들이고 1년의 시간이 지난 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녹색 기사를 찾아간다.
녹색 기사는 도끼로 가웨인의 머리를 베려 하고 도끼가 목에 닿기 직전, 가웨인은 기사에게 묻는다.
“Is this… is this really all there is?(이것이… 이것이 정말 전부인가요?)”
그러자 녹색 기사는 답한다.
“What else ought there be?(무엇이 더 있어야 하는가?)”
가웨인은 기사의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한 뒤 이내 자신을 지켜주던 녹색 허리띠마저 풀어버리고 운명을 받아들인다.
오빠와 나눈 대화, 내가 느꼈던 서글픈 감정, 내가 인생에 대해 품고 있는 흐릿한 생각들이 얽혀서 영화를 보는 내내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모르겠다.
내가 또 형편없이 납작하게 사람을 요약한 것일 수도 있다.
오빠를 이십대 중반에 알게 되어 어느덧 나도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다보니 갈수록 할 말이 줄어드는 것 같다.
오빠와 나의 나이차를 생각할 때 나같은 애송이한테 할 수 있는 말이 애초에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다.
요즘은 사실 늘 똑같아. 딱히 우울하지도 않고 별 일도 없고… 언제 한 번 내가 이렇게 말하자 오빠가 그랬다.
너도 나이가 드는구나. 장하다.
나는 이 말을 오래 생각해봤다.
더 이상 내 인생에 나를 흔드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인생의 모든 작은 것에 사정없이 흔들릴 때는 그렇게 고통스러워 했으면서 지금은 또 그때가 그리운 걸까. 내가 원하는 게 뭘까.
하긴 나는 내가 정확히 뭘 원하는지 조차 모른다.
그러면서 항상 애매한 갈증에 허덕이지.
인생이 늘 극적인 이벤트와 심오한 의미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냥 나에게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하는 일, 내가 버는 돈 그것 외에도 무언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보다 나이가 들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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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태어난 대로 밖에 못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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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졸려서 뭐라고 쓰는지도 모르겠고 자꾸 니 얼굴만 달처럼 두둥실 떠오르고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고 너는 사라질
생각도 없고 여전히 내 방 천장에 걸려서 헤실헤실 웃고 있네 내가 죽기를 바래서
정말 졸려 잘 거야 난 혁아
죽고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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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
얼마 전 신형철 교수의 책에서 인상 깊은 구절을 발견하고 메모해두었는데 메모한 쪽지가 어디로 간 지 모르겠지만 대략 이런 구절이었다.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사람은 미움을 받을 때도 고통을 느끼지만 정확하지 않은 사랑을 받을 때도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글의 요지였다. 그는 여기서 말하는 ‘사랑’을 사람 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에도 적용시킨다.
문학, 영화 등 한 작품을 보고 평가할 때 우리는 정확하게 비판하려 한다. 하지만 정확한 비판만큼 중요한 것은 정확한 칭찬이다. 비판이 다 유익하지 않듯 칭찬도 늘 유익한 것은 아니다. 신형철이 생각하는 좋은 평론이란 ‘정확하게 칭찬하는 것,’ 칭찬할 만한 작품을 핵심을 건드리는 말로 정확하게 칭찬하는 것이다.
신형철의 평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내 인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내가 한 명의 예술가라고 할 때 밑도끝도 없이 비난받는 것만큼이나 어설프게 칭찬받고 사랑받는 것 또한 큰 슬픔으로 다가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진지한 예술가라면 정확하지 않은 칭찬을 받을 때 기쁘기보다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확한 칭찬’이라는 구절에서 방점은 ‘정확한’에만 있지 않고 ‘칭찬’에도 있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 신형철에 따르면 비평은 작품을 법정에 세워두고 부정적인 단점을 찾는 재판이 아니라, 그 작품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인식을 찾는 여행에 가깝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정확하게 보고, 정확하게 칭찬하고 싶다. 어려운 일이다. 백퍼센트의 정확함은 아니더라도 근사치로라도 작품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을까. 이러한 시도가 예술가와 그의 작품에 한 명의 관객으로서 취해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든다.
 
 

7월 극장관람

7/6 러브 라이즈 블리딩 ★ ★ ★
7/11 가장 따뜻한 색, 블루 ★ ★ ★ ★ ★
7/13 안티크라이스트 ★ ★ ★ ★
7/13 플라이 미 투 더 문 ★ ★ ★ ☆
7/14 님포매니악 감독판 볼륨1 ★ ★ ★ ★
7/14 님포매니악 감독판 볼륨2 ★ ★ ★ ★
7/17 미래의 범죄들 ★ ★ ★
7/20 안녕, 용문객잔 ★ ★ ★ ★ ☆
7/21 살인마 잭의 집 ★ ★ ★ ★
7/21 만덜레이 ★ ★ ★ ☆
7/21 멜랑콜리아 ★ ★ ★ ★ ★
7/22 퍼펙트 데이즈 ★ ★ ★ ★
7/25 큐어 ★ ★ ★ ★
7/26 그랑블루 ★ ★ ☆
7/27 애정만세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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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을 정리하면서
내내 가지고 있던 캡쳐를 다 지웠다
지우며 다시 읽어보니 전만큼 슬프지도 괴롭지도 않아
그래서 알 수 있었어
드디어 모든 게 끝났다는 걸
나에게는 사랑의 시간이었고
너에게는 조롱과 비하의 시간이었구나
이 문장으로 간단히 정리하고
나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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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치킨 포 린다!
애정만세
로봇드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동경 이야기
멜랑콜리아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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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노트에
편지를 썼다
세 장이나 썼다
세수를 하다가
편지 안 줘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놀랐다
편지라는 건
안 줄 수가 있구나
이렇게 실컷
말 걸어놓고도
편지를 안 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며
냉장고에서
썰어놓은 수박을 꺼내 먹었다
/ 김은지, 초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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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지지 않는 완벽이라는 환상
그 환상 때문에 사는 거지
그 환상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비슷한 것에나마 닿아본 것 같아서
그러니까 완벽한 영화 완벽한 책
완벽한 음악 완벽한 사랑 완벽한 사람
그런 건 없고, 없어야만 하는 거지
그걸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순간
사람은 자살하지 않고 못 견디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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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
며칠 전 규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무엇인가 보고 (대체로 책이나 영화지만) 내 안에 차오른 감상을 글로 풀어내는 게 힘들다는 고민이었다. 그래서 어딘가 항상 후련하지 않은 구석이 있고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정확하게 풀어내지도 못하면서 단순히 많이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요새 자주 생각한다고 했다. 규리는 언어도 물감 같은 거라고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주었다. 표현은 돌고 도는 거고, 내 안에 표현력이 고갈됐다는 생각이 들 때는 결국 인풋을 늘리라는 신호일 것이다. 언어는 물감이고 그 물감의 질료는 경험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표적인 경험에는 책이 있겠지. 진부한 말일 수 있지만 결국 책을 많이 읽으면, 즉 인풋을 늘리면 네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대한 적확한 언어를 찾을 수 있을 거다. 두 가지 균형이 맞아떨어질 때 좋은 표현이 나온다. 나는 영화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영화도 결국 영화라는 매체를 관통하는 문법이나 규칙같은 게 있을 거다. 촬영 기법에 관한 서적을 읽어본다든가. 누군가 네가 못 느낀 걸 느낀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그 사람이 선험적으로 직관이 발달해서일 수도 있지만 인풋이 쌓여서 장르적 언어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으로 규리는 타르콥스키의 「시간의 각인」이라는 책을 추천해주었다. 원래 제목은 「봉인된 시간」이라고 한다. 스스로 영화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규리의 입에서 타르콥스키라는 이름을 들으니 신기했다. 규리는 시를 쓰는 사람이고, 타르콥스키는 책에서 영화의 시적 연결, 시적 논리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독특한 연결점이 있다. 결국 시나 영화 모두 각각 텍스트와 이미지 속에 특정한 시간과 감정을 각인하여 박아넣는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저번에는 알레고리에 대해 배웠고, 이번에도 툭 던진 고민에서 규리는 내가 바랐던 것 이상의 값진 것을 주었다. 누군가의 말을 잊고 싶지 않아서 적어두는 것은 드물고 소중한 경험이다. 그 사람이 내 친구라면 더더욱 그러하겠지. 고맙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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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이해된다는 건
아무것도 이해할 것이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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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한 권 추천 받아서 읽고 있다.
「필름메이커의 눈」이라는 책인데 영화 속 장면의 구성과 규칙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다.
영화 내 몇 초 혹은 수 분에 달하는 수많은 샷(shot)들은 모두 감독의 철저하고 치밀한 계산과 고민 끝에 나온 것이며 특정 유형의 샷이 특정 기능을 하도록 관습화된 경우가 있다. 이 책은 그 유형의 종류와 기능에 대해 기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단순히 이론만 줄줄 읊는 것이 아니라 특정 영화의 특정 샷을 예시로 보여주며 옆에 설명을 덧붙이는 방식이라 어렵긴 해도 지루하지 않다. 예시에 대부, 양들의 침묵, 펄프 픽션 같이 유명하고 잘 알려진 작품들도 있고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같은 한국 감독 작품도 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렛 미 인이나 바스터즈 같은 작품도 있어서 반가웠다.
영화의 내러티브가 아닌 제목 그대로 필름메이커의 눈으로 바라본 영화의 화면과 기술적 요소에 관해 설명하는 책이기 때문에 영화를 분석하고 평론하려는 사람보다는 실제로 영화를 만들거나 영상 제작에 몸 담고 있는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하지만 기술적 이해의 심화는 영화를 안팎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이 책은 나처럼 영화를 좋아하고 깊이있게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유용하다.
하루 한 장 읽기가 목표라 구매한지 꽤 됐는데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여러 배움이 있었다.
우선 영화의 어떤 샷이 아름답고 무게감 있다면 이것은 단순히 미학적 아름다움이나 화면 구성의 규칙 때문이 아니라 영화 촬영의 기술적 요소, 화면 구성에서의 선택, 그리고 그 샷이 내러티브 내에서 가지는 맥락, 이 세 가지가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정확하고 아름답게 호응했기 때문이라는 것.
즉 하나의 샷이 강렬하고 의미있는 샷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적 기능과 서사적 기능을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는 것.
영화가 창조된 이래 이 기술적 기능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관습화되었다. 특정한 유형의 샷이 특정한 서사에 반복해서 쓰이며 관습화된 것. 하지만 이 규칙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좋은 영화들은 이 규칙을 잘 따르거나 혹은 필요시 뒤엎으며 신선한 충격을 만들어낸다.
이야기의 필요성에 의해 특정한 촬영 기법이 그 능력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을 영화 내에서 가능한 한 많은 샷에서 해낼 때 그 감독은 유능한 감독. 이러한 샷이 많을 때 그 영화는 좋은 영화.
꾸준히(제발) 읽어나가야 할테지만 하여튼 벌써 배운 것이 많고 정말 잘 샀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요즘 좀 고민인 것은, 영화에 대해 많이 알고 공부할수록 영화를 보는 재미가 반감된다는 것인데 각각의 상태가 어떤 식으로 상관관계를 갖는지 잘 모르겠다. 분석적으로 보려는 태도가 재미를 반감시키는 건지.
아니면 그냥 H가 말했듯 또 한 번 벽을 넘을 때가 온 건지.
추천받은 영화 세 편. 내 시각을 좀 트이게 해줄거라나.
「태양은 외로워」
「당나귀 발타자르」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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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 this… is this really all there is?
- What else ought there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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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다 너의 가식이 너의 뻔뻔함이
너의 껍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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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만나요
매일 멸망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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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뭔가… 드디어 k를 진심으로 열받게 한것 같은데
여기까지 해도 연락해야겠단 생각은 안든다.
그러면서 계속 신경은 쓰지.
나보고 누가 인간관계는 기브 앤 테이크고
서로 사이에 크고 작은 이벤트가 계속 있어야 유지된다는데 그게 정말 번거롭게 느껴지고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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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can invisible men make themselves more lonely by being s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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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드시 본 영화만 올릴 것
2. 대사나 배우의 연기가 아닌 샷이나 화면의 구성이 인상깊은 부분만 올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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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이고 자족하고 자기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기 안의 열정에 정진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싶다. 적어도 대화라도 나누고 싶다. 하지만 현시대에 그런 사람은 태어나기를 정신병자거나 그렇게 산다는 이유로 온갖 공격을 받아 정신병자가 되거나 양자택일의 길 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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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하고 싶다
내 눈은 늘 젖어 있고
나는 개 눈을 이해할 수 있다고
캄캄한 새벽
짖어대는 개들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금붕어처럼 세상을 배회하고 있다고
사랑했고
아직도 사랑한다고
벽에 이마를 대고 말하고 싶다
 
/ 박연준,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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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함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고, 또 논리적인 것의 보완물로도 중요하다.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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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밍량은 인터뷰에서 "처음 대본을 쓸 때는 마지막에 한 줄기 희망을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영화의 원래 결말은 공원을 걷고 걷고 또 걷다가 여자가 손을 내밀어 사랑을 구하고 싶다고 결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파트로 돌아가서 잠자는 남자를 기다립니다. 원래 결말이 그랬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배우 양귀매가 공원에 도착하자 차이밍량은 '여기서 그냥 울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고, 바로 결말을 바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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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순간에도 나는 살기를 바라네
 
 

지 포기해야 할지. 아마 잘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두 사람 다. 애썼을 것이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젊었을 문명진과 정정희라는 두 남자와 여자를 생각하면 나는 딱 내가 살아온 나날만큼 슬퍼진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을 생각하면 나는 여기서 얼만큼 더 슬퍼질 수 있을까. 한없이 무거워지는 마음의 무게를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인생 비극의 제1막은 부모와 자식이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아쿠타가와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나는 부모 자식으로 맺어져 행복한 이들도 충분히 봤고, 불행한 이들도 충분히 봤다. 하지만 더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것은 언제나 불행이었다. 행복이 인생을 변화시키는 정도보다 불행이 인생을 변화시키는 정도를 더 크게 봐온 나는 행복하지 못한 것보다 불행하게 되는 것이 더 무섭다. 그래서 그것만은 피하고 싶다.
나는 모성의 자격이 없는 여자다. 나는 내 아이에게 어머니다운, 어머니가 응당 그래야만 하는 친밀함과 무한한 사랑을 베풀 수 없는 여자다. 나는 내 존재가 아이로 꽉 차는 것, 그것만 가지고는 만족하며 살 수 없는 여자다. 그래서 나는 이미 한 번 죄를 저질렀다. 이미 한 번 도망쳤다. 하지만 아직 가장 큰 불행은 오지 않았다. 누군가의 인생에 제1막의 비극이 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난 그걸 유지한 채 살아가려 한다.
 
 

성에 관한 몇가지 단상들

모성이 희생이라면 태어남은 그 자체로 죄가 될 것이다. 자기의지 없이 행해지는 것을 죄라고 하진 않으니 태어남은 죄가 아니고 모성도 희생이 아니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작정을 가지고 세상에 내보내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그렇게 많은 부모자식 관계가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가 어디까지 포기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을지 제대로 된 지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일순위가 된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정확히는 순위의 개념이 없어진다. 자신의 존재를 아이로만 꽉 채우는 것. 아이가 자기 세상의 전부가 되는 것. 이것이 모성이고 모성이어야 한다.
나는 확실히 모성의 자격이 없는 여자인 것 같다. 나의 존재를 내가 세상에 내보낸 아이로만 가득 채우는 것, 그것만으로 나는 만족할 수 없고 나와 아이가 서로에게 불만족하고 불행한 미래를 쉽게 그릴 수 있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그랬다. 내가 내 부모를 원망하듯 내 아이 역시 나를 원망할 모습을 나는 쉽게 그려볼 수 있다.
학원에서 일할 때 나는 자기 아이에게 지극한 것을 넘어 아이와 마치 하나의 유기체인듯 살아가는 여자들을 봤다. 나는 그 여자들에게 경외심을 가졌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외심은 불편한 감정으로 바뀌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질투였던 것 같다. 우선 여자에 대한 질투. 나는 절대로 저 여자처럼 할 수 없고 저 여자의 삶이 실은 내가 내 인생에 원하는 유일한 모습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깨닫는 데서 오는 질투. 두번째로 아이에 대한 질투. 내가 한평생 원했던 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아무 자각도 감사함도 없이 그저 당연히 받고 있다는 데서 오는 질투. 나는 나와 여자들을, 내 어린 시절과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자주 비교했다. 근무하는 내내 나는 질투에 시달렸고 그때마다 슬프고 괴로웠다.
하지만 가장 괴로웠던 순간은 나를 닮은 아이를 마주할 때였다. 손목에 자해흔을 가졌던 재혁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교우 관계도 좋지 않고 선생님들에게도 반항적인 태도를 보여서 학원에서 문제아 취급 받던 아이였다. 아이의 부모와도 여러번 전화했다. 전화 연결조차 쉽지 않았지만 어렵게 전화를 받아도 자기 아이에 시종일관 무관심하고 차가운 그 엄마가 나는 미웠다. 어쨌든 학원 내에서의 일이기 때문에 업무가 늘어나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기도 했다. 종례회의 때 꼭 언급되었던 그 아이는 결국 이사를 이유로 퇴원하게 되었다. 등원 마지막 날 마지막 교시를 끝내고 아이가 인사하러 왔다. 아이는 멋쩍게 웃으며 ‘그동안 죄송했어요’ 했다. 그대로 보낼까 하다가 계단을 내려가는 아이를 급하게 붙잡아 몇마디 말을 했다. 내가 여기 선생이랍시고 있으면서 재혁이가 힘들고 슬픈 것을 잘 몰라주고 보듬어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다, 학원에는 언제든지 놀러와도 좋고 꼭 놀러와줬으면 좋겠다, 잘 지내라 같은 말이었다. 내 가슴 정도 오는 키의 아이는 그 계단에서 나를 껴안고 헐떡거리며 울었다. 나는 딸꾹질 섞인 그 울음소리가 오래 아팠다. 너의 그 슬픔을 다 어떻게 하지. 아무도 몰라주면 네가 혼자 어떻게 하지. 네가 자라서… 겨우 나같은 어른이 되면 어떡하지.
이후에도 학원에는 재혁이 같은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의 슬픔은 발산하는 슬픔이어서 안으로 파고드는 어른의 슬픔과 다르게 숨겨지지 않는다. 두세시간 남짓 만나는 학원 선생이 보듬어줄 수 있는 아이의 슬픔은 어디까지일까. 그건 근무하는 내내 조심스러운 문제였다.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면 섣불리 손 대서도 안될 것이었다. 더 큰 슬픔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자주 못 본 체 했다. 그 상처가 어디서 온 것이든 부모가 좀 더 다정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며칠 전 나는 강변에 영화 님포매니악을 보러 다녀왔다. 약간의 텀을 두고 1편과 2편을 연달아 상영해주었다. 1편을 막 보고 나와서 담배를 피던 참에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영화를 보러 왔다고 했더니 무슨 영화인지 물었다. 나는 약간 주저하다가 제목을 말했다. 알고보니 아빠는 이미 거의 모든 라스 폰 트리에 영화를 다 본 상태였다. 우리는 전화로 님포매니악과 안티크라이스트에 대해 얘기했다. 감독의 영화 세계에 대한 아빠의 생각도 들었다. 아빠는 그가 창의적이고 기발한 감독인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가 영화에서 말하는 반사회적 주제의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며 영화는 영화일 뿐이니 내가 영향받지 않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2편의 상영시간이 다가와 전화는 길지 않게 끊어졌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아빠와 한 전화에 대해 생각해봤다. 아빠와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에 대해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딸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아마 많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내 서글퍼졌다. 아빠와 딸로 만나지 않았으면 우리는 어쩌면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빠와 딸이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주었던 그 모든 고통과 슬픔 없이 온갖 책과 영화에 대해서, 드라이브 하며 들었던 그 음악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친구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빠와 딸로 만나지 않은 평행 세계에서 우리는 지금보다 행복했을 것 같다.
집으로 가는 길에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낳았을 때 아빠가 몇살이었지? 오래 지나지 않아 ‘지금 네 나이였을걸’이라는 답장이 왔다.
엄마가 아빠보다 몇 살 어리지?
‘여섯살일걸’
왜 다 확신이 없어?
‘너무 오래돼서’
5분 정도 후에 아빠는 ‘미안’이라는 문자를 하나 더 보내왔다. 나는 핸드폰을 쥐고 골목에 서서 한참을 울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해할 수 있는 슬픔이 늘어난다. 그 말은 내 부모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늘어나기도 한다는 뜻이다. 그들을 감정적으로는 미워하면서도 머리로는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올 때마다 나는 무거운 마음이 된다. 스물일곱의 아버지는 지금의 나처럼 하고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보고싶은 영화도, 읽고싶은 책도, 훌쩍 떠나서 세상을 둘러보고 싶은 욕심도 많았을 것이다. 그때의 엄마 아빠는 몰랐던 것 같다. 자기들이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을지. 나로 인해 어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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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가 파업으로 정신과 진료를 중단했다. 교수는 내게 전원할 것을 권유하며 (사실상 강요였지만) 진료의뢰서와 6개월치 진료사본을 떼주었다. 황세호 선생님은 결국 만나뵙지 못하고 경상대에서의 진료가 끝나게 되었다.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3년 전 입원했을 때였다. 당시 내 주치의로 만나게 되어 그 후 파업이 있기 전까지 쭉 진료를 받아왔다. 입원했을 때 나는 일주일 정도 말을 잃어서 글과 일기로 면담을 대신했다. 병동에서는 병원식밖에 먹을 수 없었는데 언젠가 꿈에 작고 샛노란 마들렌이 나와서 매우 먹고 싶다고 적었다. 다음 면담때 선생님은 의사 가운에 마들렌 하나를 숨겨와 내게 몰래 전해주었다. 그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마들렌을 서랍에 숨겨두고 3일에 걸쳐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병원을 알아봐야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다. 테그레톨은 남아 있어서 오늘 내과에 가서 졸피뎀을 받아왔다. 졸피뎀을 처방받는 것은 감기약을 처방받는 것보다 쉽다. 잠이 안와요. 먹어본 적 있어요. 두 마디면 어떤 의사든지 최고치를 바로 처방해준다. 운동을 해보세요. 커피는 드시지 마시고. 같은 말을 간혹 덧붙이며.
군자에 왔다. 많이 변한 모습에 정류장을 착각하여 잘못 내릴 뻔했다. 영원히 공사중일 것 같던 1번 출구 앞 G타워도 완공되었다. 사람도 많고 차도 많아 소란스러웠다. 귀가 멍해지는 소음 속에도 완전히 정지된 내면의 장소가 있다. 그 속에서 나는 뼈 속까지 내가 혼자인 것을 실감한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생동감 있는 장면들. 가끔 나는 세상과 나 사이 어떤 층이 있어서 그 층이 외부로부터 오는 모든 생기를 빨아들이고 나를 기묘한 탈진 상태에 빠트린다는 생각을 한다. 누구를 만나도 그저 무덤 위에 무덤을 쌓는 기분. 어딜 가나 나를 따라다니는 이미지와 이미지에 대한 고통이 있지만 시골에는 그래도 꿈과 어리석음의 동화가 있다면, 서울은 완전히 이성적인 어른의 나라 같다. 모두가 싸우고, 모두가 이기는 장소…
누구에게 정착하여 안정감을 도모하려는 의도와 또 그 의도의 무용함과 번거로움, 그것들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텅빈 공허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감을 갈망하는 데서 오는 혼란이 내 마음에 스산한 바람으로 지나간다. 그러나 가장 큰 절망은 그것마저 일시적이며 그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는 다시 완전히 텅 비어버린다는 것이다.
아무와도 나는 완전히, 절대로, 또 지속적으로 공감을 나눌 수 없을 것같다.
진정한 연결을 원했던 것.
그것을 믿지 않는다 말하면서도
실은 그 가능성을 한 번도 놓지 못했다는 것.
그것만이 내가 지은 죄고 내가 앞으로도 받을 벌이다.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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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자신을 유령처럼 따라다니는 이미지가 있다. 이미지에 대한 고통도.
이 장면을 큰 스크린으로 봤을 때의 감각을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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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
즉 개별성에 대한 맹목적 긍정이다.
한 사람의 개별성은 그 사람의 상처와 결점을 포함한다.
따라서 결점이 없는 사람을 골라 사랑하겠다는 말은 최대한 사랑에서 멀어지겠다는 선언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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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 은밀함을 사랑해요.
그게 당신의 정직함이죠.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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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10초만이라도 몸에서 꺼낸 뒤 쉬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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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빙의 중요성

 

6월

6/3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 ★ ★ ☆
6/4 클레르의 무릎 ★ ★ ☆
6/6 월-E ★ ★ ★ ★ (재관람)
6/7 나쁜 녀석들: 라이드 오어 다이 ★ ★ ☆
6/10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 ★ ★ ☆
6/11 프렌치 수프 ★ ★ ★ ☆
6/19 인사이드 아웃 2 ★ ★ ★ ☆
6/20 캣퍼슨 ★ ★ ★
6/20 팬텀 스레드 ★ ★ ★ ★ ☆
6/22 태풍 클럽 ★ ★ ★ ☆
6/25 피아니스트 ★ ★ ★ ☆
6/26 우리와 상관없이 ★ ★ ★
6/26 동경 이야기 ★ ★ ★ ★ ★
6/27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 ★ ★ ☆
6/30 프리실라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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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건 선생님께.
나는 내가 한 모든 행위처럼 나의 글도 너무 맘에 안 들어 다시 읽기 싫어요.
정말로 누구에게 끌리거나 맘이 동요될 때 나는 그 사람과의 해후를 극력 피합니다. 왜인지 모르겠어요. 혼자서 생각하고 있고 싶어요. 늙은 예지에서일까요. 또는 자위 행위? 혼자서 비밀히 계단을 세우고 싶은 샤머니즘?
선생님께 인사를 보내겠습니다.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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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어떻게 백사장에 가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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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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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덕배와 너뱅이들에 산책 나간다.
꼬리를 일자로 치켜세우고 여기저기 수색하듯
냄새를 맡는 당당한 개 뒤로
얼굴보다 큰 썬캡을 쓴 할머니가 걸으며 말한다.
저 엉덩이 쌜룩거리는 것 좀 봐라.
나는 그 뒤를 그림자 밟듯 조용히 따라간다.
그날 밤 저녁
세상에는 바꾸고 싶지 않은 슬픔도 있다고 일기에 쓴다.
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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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거친 표현밖에 할 줄 모르거나, 아예 표현같은 것은 할 줄 몰라도 좋으니 수사학적인 궤변만 늘어놓지 않기를 바란다. 형식은 아무래도 좋으니 본질에 다가가기를 바란다. 그것이 세상에 전달하거나 이해시키기 불가능한 것일 지라도 내 안의 본질과 의미를 깊이 파내려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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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특별히 내밀한 쾌감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나는 영화 내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관철하기 위해 당위와 필연성을 가진 폭력은 얼마든지 허용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특정 집단에 대한 극도의 착취적인 상상력과 혐오적인 태도를 가진 영화가 시각적 탁월성이나 스타일의 측면에서 '작가영화' 또는 '예술영화'로 분류되어 치켜세워지는 건 지성을 가진 한 명의 관객으로서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영화가 고어나 스너프처럼 장르영화로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지만, 예술로 받아들여지는 건 가장 세련하고 위험한 종류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도덕의 빈틈을 파고들어 사유하게 하는 것이 예술영화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도덕에서 일탈하고 나아가 도덕을 공격하며 거기에 어떤 책임이나 죄의식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그 자체로 예술이라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지나치게 빈약하다. 그건 예술도, 사고의 허를 찌르는 기발함도, 사회적 저항이나 운동도 아닌 그저 거대한 혼돈일 뿐이다. 이야기가 좀 딴 데로 샜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조지 밀러가 그려내는 폭력에는... 그 점에서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 노장 감독이 그려내는 폭력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영화적 체험으로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새삼 조지 밀러의 나이가 경이롭게 느껴진다. 젊은 감독이 인생을 다 살아본 것처럼 만든 영화도 물론 재미있지만, 일흔 아홉의 나이에 한 번도 나이들어 본 적 없는 것처럼 만든 영화는 아무래도 더한 놀라움과 신선함을 준다. ... 영화에서 주인공 '퓨리오사' 역의 안야 테일러조이의 대사는 고작 서른 마디에 불과하다. 밀러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The problem with dialogue is that it tends to slow things down. Film is a medium often best enjoyed at high speed."라고 말한 바 있다. 영화 '듄'의 감독인 드니 빌뇌브 역시 "Frankly, I hate dialogue."라고 말해서 소소한 화제가 된 적 있다. 많은 영화에서 대사는 영화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데 반해 이 두 감독은 대사를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걸 넘어 때떄로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두 감독에게 영화란 대사보다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으로 시청각으로 체험되는 것에 가까우며 그것이 책이나 그림이 아닌 '영화'라는 매체여야 했던 이유이기 때문이다. 대사를 통해 영화를 이끌어가는 로메르 같은 감독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스타일인 것 같다. 나는 어떤 게 좋다, 나쁘다 같은 생각은 없고 둘다 즐기며 둘다 각자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 영화 중간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We seek sensation, any sensation to wash away the cranky, black sorrow. ... We are the already dead, Little D, you and me." 그리고 이 대사는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컴컴한 슬픔을 씻어내기 위해선 어떤 자극이라도 찾잖아. 너와 난 이미 죽은 자들이야, 리틀 D." 나는 이 번역이 디테일의 측면에서 굉장히 잘 한 번역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깜깜하다, 껌껌하다, 캄캄하다도 아닌 '컴컴하다'로 번역된 것이 좋았다. '컴컴하다'는 '껌껌하다'의 거센말로 아주 어두운 것을 나타낸다. 어둡다는 뜻에서 의미적 차이는 없지만 그 정도가 '깜깜하다'나 '껌껌하다'보다 세다. 'sorrow'가 'sadness'보다 의미적으로 한 단계 위의 슬픔인 것을 생각하면 '슬픔' 앞의 형용사가 '컴컴한'인 것이 좋은 선택 같다. 그리고 'sensation'은 감각, 느낌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자극'으로 번역된 것 또한 마음에 든다. 디멘투스가 퓨리오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퓨리오사가 감각, 느낌을 찾는다는 것이 아니라 폭력처럼 정도가 센 자극을 찾는다는 의미가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번역은 원본을 레퍼런스로 한 새로운 창작이고, 원본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보다 뉘앙스를 가져오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떠올리면 어려운 작업을 잘 한것 같다.
06.22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동물이어서 괴롭다. 이미 지나간 인연에 만약이란 건 없다.
06.25
내가 나쁜 사람이었고, 나쁜 사람이고, 나쁜 사람일 수 있다는 양심이, 그 양심 때문에 아픈 마음이 너에게도 존재하니?
06.27
성이랑 건대에서 만났다. 약속에 30분 정도 늦었다. 성이한텐 잠들었다고 했는데 사실 눈화장이 마음에 안들게 돼서 고쳐 하느라 늦었다. 성수로 이동해서 같이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봤다. 그후 다시 건대로 넘어와서 술을 마셨다. 성인 정말 소주를 싫어한다. 한 잔 마시면 꼭 물로 입을 헹군다. 그럴거면 토닉워터 시켜서 섞어 먹으라고 했는데 그건 하남자라고 한다. 발개진 얼굴이 귀여웠다. 성이는 좋은 사람이다. 좋은 남자다. 하지만 내가 성이를 열렬히 사랑하는 모습은 좀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06.28
사랑은 불꽃이 아니라 성실에의 의지라고 일기에 적은 적 있다. 시간이 어느정도 흐른 뒤의 사랑은 확실히 불꽃같지 않다. 시간이 흐른 후에는 성실, 정직, 신뢰 같은 것들이 중요해진다. 하지만 아무런 불꽃 없이 시작되는 사랑도 있는 걸까? 그런 게 세상에 있다 한들, 나에게 가능한 걸까?
06.29
세연이랑 영등포에서 만났다. 영등포는 살면서 처음 가보는 것 같다. 롯데 백화점과 신세계 백화점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신세계 오른 편에는 이상하게 한적한 골목이 하나 있는데 조금만 들어가면 사창가다. 역 바로 앞에는 교회에서 나온 사람들이 원을 형성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정말 기묘한 분위기의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연이랑 신세계 지하에서 샤브샤브 먹고 커피 마시며 이런저런 수다 떨었다. 무슨 대화 했는지는 늘 그렇듯 기억 못하지만 많이 웃고 즐거웠다. 너랑 맛있는 밥 먹고 식후땡 하는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 내 입에서 진심으로 그런 소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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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6
주변에서 자꾸만 영화쪽 일을 알아보라고 한다. 내가 영화에 학문적으로 다가가거나 직업으로 삼을만큼 진지하지 않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나는 영화를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그것도 감성적인 기억에 의해서만 좋아한다. 음악을 듣고 특정 기억과 감정을 불러오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나. "그때 내가 참 슬펐는데 이 음악이 내 상황과 데칼코마니처럼 들어맞는 것 같았어" 하는. 나한테는 영화가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영화에 진지하고 학문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이라면 영화의 완성도나 연출 기법 등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공부하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내가 아는 것에 대해 말하는 영화만 보러다니고 내가 아는 것에서만 감동을 느낀다. 영화를 내 개인적인 기억이나 감정과 결부시키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떤 대상에 이런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은 그 대상에 결코 냉철하거나 진지해질 수 없다. 따라서 직업으로 삼을 수도 없다.
06.07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 장편 영화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그의 수상소감이 인터넷에서 화제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소감문이 적힌 종이를 잡고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가자지구에서 자행되는 학살에 어떻게 오용되고 있는지 소신을 밝히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 속에 경건한 감탄이 차올랐다. 떨리는 손과 떨리는 음성으로 다가올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해야할 말을 하는 것. 인간의 용기를 형상화 한다면 저런 모습일 것 같다. 그가 수상소감을 할 당시 뒤에 서있던 사람은 블라바트니크라는 극우 시오니스트 영화 프로듀서였다. 헐리우드 영화계가 유대인 자본으로 성장하여 유대인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현 팔레스타인 사태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창작물을 제작한 창작자들에게 불이익이 있었던 것이 공공연한 사실임을 생각하면 그의 용기가 실로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도 하기 어렵다. 2015년 즈음 「언더 더 스킨」으로 그의 영화를 처음 극장에서 관람하였다. 그로부터 근 10년만에 만나는 감독의 장편이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감독의 시선은 더욱 예리하고 날카로워졌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 예술의 가치를 한 궁극으로 가져간 작품이다. 관람한지 2주 정도 지났지만 아직도 어떤 장면은 머릿속에 현현하다. 그는 이 작품을 만드는 시간이 일종의 종교적인 체험 같았다고 말했다. 그의 벌벌 떨리는 손에서 영화와 세상에 대한 진심이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서 이 영화를 관람하기를 바란다.
06.10
복숭아가 철이라고 해서 세연이 집에 한 상자 보냈다. 맛있겠지?
06.11
영화 「프렌치 수프」 시사회에 다녀왔다. 행복은 갖고 있는 것을 계속 열망하는 것. 이런 관점에서 행복은 굉장히 불안한 것일 수 있다. 갖고 있는 것이 사라지면 행복도 사라진다는 거니까. 하지만 내가 가진 것 중 사라지지 않을 것을 열망한다면? 내 두 눈과 두 귀, 입, 손. 그들이 감각하는 것. 매해 돌아오는 사계절과 그로 인한 기쁨. 맛있는 것을 먹고 행복한 마음 같은 것. 내게서 쉬이 사라지지 않은 그것들을 열망한다면.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갖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열망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슬퍼할 지언정, 절망하지 않는다. (+ "나는 당신의 아내였나요, 요리사였나요?"라는 외제니의 질문에 도댕은 '요리사'였다고 답하고 외제니는 웃으며 "Merci(고마워요)"라고 대답한다. 단순히 내가 사랑했던 한 여자가 아니라 유능했던 파트너로서 인정해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현인 것 같다.) (+ "당신은 우리가 인생의 가을에 만났다고 했지만 난 지금이 여름같은 걸요.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여름일 거예요."라는 대사도 기억에 남는다.) (+ 작중 등장하는 수프에 관한 대사 "건더기를 건져내고 오래 끓이면 맛은 약해지지만 훨씬 깔끔하고 부드러워지지."에 걸맞았던 영화. 삼삼한 간의 기분 좋은, 자극적이지 않지만 그래서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될 것 같다.)
06.13
시골의 정취와 여유, 거기서 오는 행복을 한 번이라도 맛 본 사람은 도시의 세련된 멋이 대단치 않은 것으로 느껴진다.
06.15
즐겁기 보다 괴롭지 않으려고 한다면 중독상태라는 문구를 봤는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담배든 인간이든 사랑이든 순수하게 즐거운 마음 보다는 그것이 없는 상태가 괴로워서 했던 적이 많은 것 같다.
06.16
처음 본 직후보다 우리의 마음, 정신, 영혼 속에서 계속 커져가는 영화가 있다. 나는 그런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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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K와 약속 때문에 압구정에서 택시를 타고 구의로 왔다. 횟집에서 우럭이랑 연어 반반에 소주를 마셨다. 둘다 어느정도 취기가 올라오고 같이 담배를 피다가 K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넌 사람이 싫은 척 하지만 사실은 사람이 무서운 거야.
어떤 대화를 나누다가 어떤 맥락에서 한 말인지는 기억이 안난다.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도 잘 기억 안난다. 그애는 자주 나를 꿰뚫어 보려 하고 자기 생각을 숨기지도 않는다. 그게 나를 불편하게 할 때가 있다. 다른 사람 입에서 나오는 나에 관한 말은 그게 사실이어도 별로 듣고싶지 않다. 게다가 난 그런 거 하라고 이미 의사한테 매달 비싼 돈을 주고 병원에 다니고 있다.
K가 갑자기 약을 끊을 생각은 없냐고 했다. 나는 이런 말을 여태 만 번은 들었고 그때마다 비슷한 답을 해주는 것도 지쳐서 아직은 먹어야할 것 같다고 답하고 적당히 넘기려 했다. 난 네가 약 없이 극복해봤으면 해서. 이 말도 그냥 넘길 수도 있었다. 근데 약을 끊으라는 지겨운 말도 아니고 K의 동정어린 눈빛도 아닌 극복이란 단어가 어딘가 내 심사를 뒤틀리게 했다. K야 내말 들어봐봐.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서 말하려면 일단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정의를 정확하게 내려야 하잖아. 넌 나한테 극복하라고 하는데 그러면 일단 극복이 뭔지부터 정의를 내려야하잖아. 사람이 무엇으로부터 극복한다고 했을 때 그 극복이란게 뭔지. 어떤 상태가 극복한 상태인건지. 이거에 대한 정의가 있어야 그 사람이 극복이란걸 했는지 안했는지 알 수 있잖아. 근데 난 극복이 뭔지 조차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게 아니라 어떤 상태가 극복인건지 조차 모르겠다고. 넌 알아? 알면 나한테 말해줘. 말해주면 차분히 들을게.
평소 말이 길지 않은 애가 말을 다다다 쏟아내니 좀 당황했던것 같다. 그 뒤에 답으로 뭐라뭐라 했는데 기억은 안난다. 아마 별로 귀담아들을 필요 없는 말이라 기억 못하는 거겠지.
몇번 언짢았던 순간이 있었지만 술자리는 전반적으로 즐거웠다. K가 남자를 소개시켜 준다고 난리를 치기 전까진. 두시 였나 둘다 많이 취해서 담배를 피는데 네가 딱 좋아할 것같은 애가 있다며 이 근처에서 술마시고 있으니 부른다고 했다. 싫다고 하는데도 한번만 만나보라고 억지를 부렸다. 하는 수 없이 부를거면 불러라 하지만 나는 세시에는 간다고 했다.
남자가 도착해서 셋이 같이 술을 마셨다. 근처에 있다던 남자는 알고보니 신림에서 구의까지 택시를 타고 온거였다. IT쪽에 종사하고 무슨 서버 망 구축 그런 일을 한다고 했다.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들었다. 처음 도착해서 인사할 때 내가 올려다 봐야할 정도로 키가 컸고 눈에는 쌍커풀이 깊게 져있었다. 내가 좋아할 거라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돼서 K를 보니 느끼하게 웃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서글서글한 인상인데 말은 좀 툭툭 던지는 느낌이었다. 근데 그게 선을 넘지는 않아서 재밌다 정도로 느껴졌다. K가 계속 중간에서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둥 건조한 대화에 불을 붙여주려고 했다. 그러다 내가 성함도 안 여쭤봤네요 하고 그제야 이름을 물어봤다. 남자가 답해준 순간 얼굴에 찬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술기운이 달아나면서 피로가 몰려왔다. 이름을 알았으니 불러야 하는데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술자리에 더 앉아있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K한테는 애초에 나는 세시에는 간다고 하지 않았냐 하고 일어났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성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아 인생은 진짜 재밌는 거 같애. 성이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옥아 아무 생각말고 그냥 자자 재워줄게 라고 했다. 집앞에서 공연히 담배만 몇대 피고 씻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잠든 것 같다. 성이랑 무슨 말을 했는지, 내가 실수한 건 없는지, 그 후로는 기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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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0 ①
퇴근 후 압구정에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러 다녀왔다. 6년 전쯤 H가 원작소설을 재밌게 읽었다고 해서 나도 영화를 찾아봤었다. 제주도에 두달 정도 살았을 때였는데 내 기억으로 제주도에 온 첫날이었다. 원치 않는 어색한 저녁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제주도에 온 것이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을까 한껏 우울해하고 있던 저녁이었고 밖에는 머리맡의 창이 부서질 것처럼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영화의 아름다운 장면들과 세밀한 감정묘사에 집중해서 보고 당시 내 우울한 기분을 더 극적으로 몰고가며 끝끝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엘리오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엘리오에 몰입하고 공감했었다. 나 자신이 그때 엘리오처럼 강렬한 사랑에 푹 빠져 있기도 했고 올리버라는 인물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은 엘리오에 비해 미묘하고 은밀해서 처음 봐서는 파악하기 쉽지 않기도 했다. 영화는 올리버의 조심스럽고 의뭉스러운 성격, 사람을 밀어내고 스스로를 통제하는 성향을 계속해서 여러 행동과 대사로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계란을 좀 더 먹으라는 말에 그는 「아니에요. 전 저를 알아요. 두 개 다음엔 세 개, 그 다음엔 네개...」라고 말한다. 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키스한 후, 멈추지 않고 달려드는 엘리오를 밀어내며 「난 나를 잘 알아. 우린 지금까지 잘 해왔어. 우린 아직 어떤 부끄러운 일도 하지 않았고 그건 좋은거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엘리오의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그건 너무 다정한 말」이라며 갑자기 수영장에 빠져버리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후 돌연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그는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 혹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욕망에 굴복하는 사람이다. 또한 욕망의 소용돌이 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상대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까 계속해서 걱정하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시종일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숨기지 않는 엘리오에 반해 올리버의 대사와 행동은 많은 부분 의미심장하고 속내를 알기 힘들다. 그는 자주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거나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그 표정은 얼핏 주저하고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올리버에 집중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런 것도 알아챌 수 없었다. 그의 머뭇거림, 고뇌가 깃든 표정, 자신에 대해서 여러번 고통스럽게 되돌아보고 일정 결론에 다다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과 행동. 이런 것들이 시간이 많이 지나 두번째 보는 지금에서 보인다. 그리고 이제서야 보인다는 점에서 가슴을 더 저릿하게 한다.
좋은 영화에는 대개 좋은 음악이 나오지만 이 영화에서 음악이 갖는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 이 영화는 Sufjan Stevens의 음악이 아니면 지금과 같은 명성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에는 Sufjan Stevens의 음악이 총 세 장면에 걸쳐 등장하며 인물이 처한 상황과 마음을 드러낸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올리버가 돌연 사라져버리자 엘리오는 그런 그를 기다린다. 어둑해져가는 배경을 바탕으로 첫번째 노래인 「Futil Devices」가 흘러나온다.
It's been a long, long time since I've memorized your face
(당신의 얼굴을 기억한지 오랜 시간이 흘렀어요)
It's been four hours now since I've wandered through your place
(당신의 장소를 서성인지 이제 네시간 째예요)
I do love you
(난 당신을 사랑해요)
I do love you
(진심으로)
둘이 처음으로 함께 여행을 떠났을 때 아름다운 산과 옥빛의 폭포수를 배경으로 두번째 노래인 「Mystery of Love」가 흘러나온다.
Oh, to see without my eyes
(오, 눈을 감아도 선명히 보여요)
The first time that you kissed me
(당신이 내게 처음으로 입을 맞추던 순간이)
Boundless by the time I cried
(끝없이 울었던 순간들에도)
I built your walls around me
(당신이라는 벽을 내 주위에 쌓아나갔죠)
Hand of God, deliver me
(신이시여, 저를 구원해주세요)
Oh, oh woe-oh-woah is me
(오, 어쩌면 좋을까요)
The first time that you touched me
(당신과 처음 닿았던 순간)
Oh, will wonders ever cease?
(이 경이로움들이 사라지기는 할까요?)
Blessed be the mystery of love
(사랑의 신비로움에 축복이 있기를)
그와 마지막이 될 전화를 끊고 벽난로 앞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엘리오를 배경으로 세번째 노래인 「Visions of Gideon」이 흘러나온다.
I have loved you for the last time
(당신을 마지막으로 사랑했어요)
Is it a video? Is it a video?
(이건 그저 환상에 불과한가요?)
I have touched you for the last time
(당신을 마지막으로 어루만졌어요)
Is it a video? Is it a video?
(이 모든 것이 그저 환상일 뿐인가요?)
아름답고 서정적이며 신비로운 Sufjan Stevens의 음악은 이 영화에 의미와 감정을 더해주고 관객의 마음에 잊지 못할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인생의 어느 때에 큰 스크린과 좋은 음향으로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는 건 축복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2024.05.10 ②
온 우주가 합심해 내게 한 사람을 사랑하도록 종용하는 듯한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다. 이 영화는 순수하고 진실된 순간들로 빛나는 사랑의 섬세한 기억이 가득 채워져있다. 마지막으로 엘리오의 아버지가 상심한 엘리오에게 조언하는 대사를 잊고싶지 않아 적어둔다.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내 목울대를 시큰하게 한다.
「Right now you may not want to feel anything.
지금은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을거야.
Perhaps you never wished to feel anything.
평생 느끼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
We rip out so much of ourselves to be cured of things faster
우리는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려고 마음을 뜯어내 버리지만
that we go bankrupt by the age of thirty and have less to offer each time we start with someone new,
그렇게 하면 서른살 즈음엔 파산해버리고 새로운 사람에게 줄 게 없어진단다.
but to make yourself feel nothing so as not to feel anything - what a waste.
아픔을 느끼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겠다니, 그런 낭비가 어디 있니?
How you live your life is your business.
어떻게 인생을 살든 너의 소관이지만 이것만은 기억하렴.
Just remember, our hearts and our bodies are given to us only once,
우리에게 몸과 마음은 단 한번 주어진단다.
and before you know it your heart's worn out; and,
네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마음은 닳아 헤지고
as for your body, there comes a point when no one looks at it, much less wants to come near it.
몸은 아무도 봐주지 않는 순간이 오고 다가오는 사람도 적어지지.
Right now, there's sorrow, pain. Don't kill it and with it the joy you've felt.」
그러니 지금 너의 그 슬픔, 그 괴로움. 모두 간직하렴,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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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곳에 갈 때 사람들은 구조를 외우며 들어가지
나올 때를 염두에 두고
처음부터 그랬지 너에게 발 디딜 때
나는 길을 잃지 않으려는 생각 뿐이었어
도망칠 때를 염두에 두고
그것이 내내 이렇게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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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예뻤고, 세상을 사랑하는 내가 예뻤어. 뭔가를 사랑하는 일이 제일 쉬웠지. 나부끼는 잎새에도 마음이 일렁였고 한 송이 꽃에도 매혹되었어. 너의 사소한 생각에도 감탄했고 너의 작은 몸짓에도 감동했어. 너의 기억에 작은 뿌리를 내린 내 자신이 기특했어. 세상은 감탄과 감동으로 가득했지. 잠든 너의 숨소리에서 리듬을 찾던 일이나 너의 기다랗고 얇은 속눈썹의 개수를 세는 일, 이 모두가 가슴 시리게 근사했으니까. 긴 장마가 시작되고, 너는 비와 함께 사라지고, 내 몸은 물의 성질을 띄기 시작했어. 네가 사라지고 세상이 조용한 곳이라는 걸 알았지. 나는 더 이상 사랑할 것이 없다고 중얼거리며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걸었어. 희미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도 점점 휘발되어가는 영혼. 누군가와 손을 맞잡으려 하면 내 손은 그 손을 통과했어. 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유원지가 되어가고 있었어. 아침에 눈을 뜨면 고개를 들어서 몸을 내려다 봤어. 오늘은 또 내 어디가 사라질까. 두 눈이 사라질까. 양 팔이 사라질까. 나는 너를 기다렸어. 네가 돌아와 내 몸을 다시 불투명하게 만들어 주기를.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몸이 조금씩 사라지는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이렇게 야금야금 사라지다가 마침내 한 방울의 물로 변하면 그때 네가 거짓말처럼 나타나 나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줄 것 같았어. 하지만 너는 오지 않았고 다음날 나는 입 없이 말하는 법을 배웠지. 그때쯤 나는 구원에 대해서도 배웠어. 내게 구원이란 원하는 것을 주는 방식으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나에게 구원은 원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방식으로 찾아온다는 걸. 너는 내 구원이 아니었던 거야. 너를 원하는 마음의 종말. 그게 내겐 구원이었어.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내 몸은 사라지지 않았어. 대신 온 몸에 버섯이 자라기 시작했지. 오직 나만 볼 수 있는 버섯이. 색색의 화려한 버섯이.
맑은 것들만 사랑했던 때가 내게도 있었어. 반짝이는 모래알이나 흔들리는 억새풀. 내 볼을 가볍게 훑던 네 손바닥의 온기.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으면 들려왔던 뱃고동 같은 네 심장 소리. 내가 희망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 세상이 예뻤고, 세상을 사랑하는 내가 예뻤어. 뭔가를 사랑하는 일이 제일 쉬웠지. 그런 시절이 내게도 있었어.
2024.06.26
 
 

인사이드 아웃 2

너희도 그렇게 애쓰고 있구나 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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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다 전화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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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9
커피 절대 금지. 가급적 담배도 금지.
퇴근 후 골목길에서 담배를 피고 전철을 타기 위해 역사로 올라가는데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눈앞의 이미지들이 흐려지며 서로 다른 색의 물감을 한데 마구 섞어놓은 것처럼 뭉치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져서 의식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커피를 마시지 않은 어제는 무사히 지나갔다.
오늘은 잠깨려고 커피 배달해 마셨더니 그제처럼 신체증상이 나타나며 패닉어택이 왔다.
그저께 긴가민가 했는데 확실히 커피는 마시면 안될것 같다.
이어폰을 끼고 Bahamas의 「My Love」을 최대 크기로 틀고 반복해서 들었다.
눈을 감고 속으로 Do I know you at all?을 반복해서 불렀더니 두근거림이 멎었다.
오늘 아트나인에서 영화 「정순」 GV가 있어서 이수역에 왔는데
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 역내 알라딘 중고서점에 왔다.
크기도 꽤 크고 앉아서 책 읽을 수 있는 자리도 있다. 이 서점이 나에게 큰 위안이 된다.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 사람도 많지 않고 책상이 있어서 이렇게 글도 쓸 수 있다.
제목에 끌려 페터 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이라는 책을 가져왔는데 활자가 눈에 잘 안들어와서 책은 덮어놓고 노트에 글을 쓰고 있다.
주치의가 일기를 쓰는 게 내게 큰 도움이 된다고 했는데 확실히 글을 쓰다보면 쓰는 행위에 집중하느라 고통에서 주의를 돌릴 수 있다. 또한 증상을 적어두는 것은 나중에 있을 상담에 도움이 되고, 내 감정을 한발자국 떨어져서 관찰하는 것,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일단 빠져나오는 것만으로 증상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된다.
내 고통이 내 이해를 넘어선 어떤 것이라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
누구에게도 내가 체험한 것을 전달할 수도,
이해시킬 수도 없다는 생각이 밀려오면
이 지옥은 철저히 나만의 지옥이란 것을 실감하면
사람이, 거리가, 익숙한 풍경들이 아주 낯설게 느껴진다.
경악의 순간은 아주 잠깐이고
그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고 한꺼풀 밖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무감각하고 얼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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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출근하고 잠이 안 깨서 1층에서 점보 사이즈로 커피를 사다 마셨다.
회사에서 내색은 안했지만 내내 어딘가 불안하고 안절부절했는데
퇴근하니 심장이 저 밑으로 꺼지는 것같은 느낌.
정신을 놓치면 차도에 뛰어들 것 같았다.
날이 좋아서 걸어서 집에 가고 싶었는데 게속 충동이 느껴져서
거리에 오래 있으면 안될 것 같았다. 곧장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숨이 잘 안쉬어지고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죽거나, 적어도 의식을 잃고 싶은데 잃어지지 않는다.
비상약도 없다. 뭔가 저지를 것 같은 느낌.
자살충동이 심하게 든다. 어떻게 해야할까.
자살충동이 들면 그 생각에 집중하여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그 생각을 몰아내기 위해 한 가지만 집착해서 하게 되거나 둘중 하나인것 같다.
나는 멀티태스킹을 좋아하진 않지만 멀티태스킹에 능한 사람이다.
한번에 여러가지 일을 큰 어려움 없이 해낸다.
회사에서도 두세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면서 실수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살충동이 들 때는 머릿속의 충동을 몰아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충동을 몰아내는 것만으로 너무 힘들고 진이 빠져서
꼼짝 않고 앉아서 허공을 응시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행동도, 말도, 생각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린다.
가슴 답답함. 호흡이 편하지 않음. 오심. 안절부절.
다른 생각을 해봄. 심호흡 해봄.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 명상해봄. 큰 소용은 없다. 카페에 가자. 가서 아무것도 안하더라도 사람이 많은 곳에 앉아라도 있자.
자살은 엄청난 일이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러니 몸에 기운이 좀 돌아왔다 싶을 때, 한마디로 일을 저지를 힘이 충분할 때
그런 충동이 올라오는 것 같다.
지금은 간신히 정신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지만
단 한번 그 끈을 놓치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를 것같다.
앤드루 솔로몬은 우울증에 관한 강연에서
시인이자 심리치료사이며 양극성 장애를 가진 자신의 친구 매기 로빈스에 관해 언급했다.
그녀는 그가 목격한 가장 끔찍한 증상을 가진 환자였다고 한다.
그녀는 며칠씩 꼼짝 않고 앉아서 머릿속으로 피터 폴 앤 매리의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을 불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아무도 아니야. 너는 살자격조차 없어.」 라는 목소리를 몰아낼 수 없어서.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아니, '이런' 기분의 정체가 뭔지 조차 알 수 없다.
이런 기분이 뭐길래 나를 죽고 싶게 만드는지
당장 차도로 뛰어들어 온 몸을 으깨고 싶은 충동을 주는지
그 충동을 참기가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지 알 수 없다.
이 고통의 시작점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끝이 어디일지도 모른다.
끝이 있기는 있는지도 모른다.
나를 괴롭히는 이 고통은 매우 실제적인데
그 정체는 모호하기만 하다.
이 고통은 내가 일상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밟고 살아가게 하는데,
나는 고통의 정체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
'기분'에 관한 병은 치료 자체가 난항이다.
가령 치료를 위해 약물을 복용했다고 치자.
약물 치료는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게 어떤 슬픈 사건이 생긴다.
내가 이때 슬픔을 느낀다면
이 슬픔이 약물 치료가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증거인지, 즉 병적인 슬픔인지.
아니면 슬픈 사건으로 인한 슬픔인지, 즉 정상적인 인간 기능으로써 슬픔인지.
구별해낼 수 있을까? 불가능에 가깝다.
의사조차 불가능하다. 정신에 관한 병은 오로지 환자의 말을 듣고 판단하니까.
이걸 구분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기분을 치료하는 게 애초에 가능하기나 한걸까?
무엇을 어떻게 인식하는 지가 그것이 실제 어떠한지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지옥은 장소가 아닌 상태라고 한다.
하지만 무엇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능력,
고통을 다른 것으로 바꿔 인식하는 능력 자체가 박탈된 상태가 정신병이라면?
고통에 몰두하여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상태가 정신병이라면?
Y가 나에게 그랬었지.
넌 말하자면 예쁜 그림이 있고
그 그림에 아주 작은 점이 찍혀 있는데
남들은 예쁜 그림을 볼 때 넌 그 점에만 집중하는 거야.
지금 나에게 있는 너무나도 실제적인 고통과
앞으로 다가올 예견된 고통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수도 볼수도 느낄수도 없다.
D에게. 하루 걸러 하루 이런 식이면 난 못 살아. 살고 싶지 않아.
 
 

5월

5/5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 ★ ★ ★
5/5 차이콥스키의 아내 ★ ★ ☆
5/6 여행자의 필요 ★ ★ ★ ★
5/9 정순 ★ ★ ★ ☆ (GV)
5/10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 ★ ★(재관람)
5/11 악마와의 토크쇼 ★ ★ ★
5/11 비거 스플래쉬 ★ ★ ★ ☆
5/12 범죄도시4 ★ ★
5/14 아이 엠 러브 ★ ★ ★ ☆
5/15 녹색 광선 ★ ★ ★ ★ ★
5/16 해변의 폴린 ★ ★ ★ ★ ★
5/17 이프: 상상의 친구 ★ ★ ☆
5/19 디피컬트 (이벤트) ★ ★ ★
5/21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 ★ ★ ★ ★
5/23 존 오브 인터레스트 ★ ★ ★ ★ ★ (GV)
5/30 코코 ★ ★ ★ ★
5/31 드림 시나리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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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이나 지났지. 몇년이나 지났는지 세어봐야 한다는 게 슬프다. 내가 앞으로 사랑에 관해 글을 쓴다면 그건 전부 너를 원형으로 한 걸텐데. 그 글들이 회고록은 될 수 있어도 일기는 될 수 없다는 게 슬퍼. 네 편지를 자주 읽는다. 읽으면서 울어. 매일 울고 지금도 울고 눈물의 방에 있는 것 같다.
 
사랑하는 옥이에게.
옥아, 지금은 거의 밤 11시가 다 돼 가. 지금쯤이면 집에 도착했으려나? 오늘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고 검게 탄 내 얼굴 보러 와줘서 고마워. 맨 처음 옥이가 도착했을 때 난 2층에서 옥이를 알아챘어. 날씬한 실루엣, 긴 갈색 머리, 얇은 다리. 가족과 옥이를 보기 전엔 만나면 큰 목소리로 환영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더라. 엄청 떨리고 설레였어. 옥이는 기억나나. 오늘 우리 맨 처음 마주했을 때 필승 신고합니다 하고 내가 구령 외치던 거. 사실 필승 하고 손을 내려야 하는데 긴장해서 끝까지 손을 안 내렸어. 동기들에게 좋은 안줏감이 될 것 같다. 아무튼 옥이가 차에 내려서 손이 떨릴 정도로 떨렸다는데 나도 많이 긴장한것 같아. 처음 구령을 외치고 옥이는 눈물을 흘렸지. 좀 더 다정하게 껴안아 주지 못해서 미안해. 오늘 내 느낌은 그냥 꿈을 꾼 것 같아. 난 정말 느끼는 게 느린 사람 같아. 아니면 오늘 면회시간이 너무 짧았던지. 옥이의 존재를 더 느끼고 싶은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잘 누리지 못한 느낌이 많이 들어. 옥이는 오늘 어땠는지 궁금하다. … 맛있게 밥을 먹고 성당에 갔지. 옥이는 성당 가는 길 대나무 숲을 좋아하는 것 같더라. 옥아, 대나무를 좋아하니? 언제 담양에 한번 놀러가야 할 것 같다. 오늘 아쉬운 건 성당 내부에 들어갔을 때 바다가 보이는 창이 닫혀있었던 거야. 성모 마리아상 옆 의자에 앉아 설교 시간에 멍때리며 바다를 볼 때의 평온함을 옥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는데, 최소한 그 자리의 풍경을 선물하고 싶었는데 아쉬워. … 죽는 건 슬픈 거야. 옥이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와 하고 싶은 것들, 할머니에게 효도하고 싶은 마음, 다 거짓인가? 그게 아니라면 쉽게 죽는다고 하지마, 옥아. … 그래서 나는 옥이가 재미있게 읽었다던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을 읽을 예정이야. 읽고 싶은 책이 많고 옥이와 같이 책 내용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오늘 정말 수다쟁이였다. 옥아 이만 줄여야할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다음 편지에 하도록 할게. … 다음에 이야기 해줘. 또 자주 편지 할 테니 불안해하지 말고. 보고싶다 옥아. 사랑하고 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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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 질 무렵 늪 한가운데서 들려오는
함께 있자는 낮은 목소리
나는 너한테 그런 목소리였을 테고
이슬을 온몸으로 맞아낸 어둔 새벽
먼동 트는 지평선 너머로 들려오는
그래 여기 있을게 라는 슬픈 다짐의 목소리
너는 나한테 그런 목소리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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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온 생애를 걸고 한 사람을 사랑으로 망치겠다는 다짐이라니 이 영화 안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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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주문으로 책장을 정리하다가 황인숙의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라는 제목의 시집을 보고 한동안 서있었다.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다. 그럼 시인의 생각에는 세상에 다 한 사랑이란 것도 있는 걸까. 전에 잘 키워보겠다는 다짐으로 데모루를 데려왔던 것이 생각났다. 식물을 키우는 게 처음인 내게 꽃집 아줌마는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며 마지막에 덧붙였다. 근데 그렇게 해줄 거 다 해줘도 이유없이 죽기도 해요. 너무 부담 갖지 말아. 봄에 데려온 데모루는 그 해 겨울을 무사히 월동하여 이듬해 봄에는 꽃송이가 두 배로 늘어났다. 집에 오는 사람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꽃이 참 예쁘다고 했다. 나는 그때마다 꽃 이름은 데모루고요, 꽃말은 행복이에요 하고 알려주었다. 겨울도 무사히 넘긴 데모루는 정작 활짝 피어야 할 여름에 갑자기 꽃대부터 시들더니 뿌리까지 썩어버렸다. 그래도 상심하진 않았다. 난 할만큼 했다는 생각이었으니까. 못다 한 사랑, 다 한 사랑 그런 건 잘 모르겠다. 세상의 어떤 일은 내 의지가 전혀 작용하지 않기도 하니까. 그러니 뭐든지 할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면 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걸로 된 것이다. 일이든 공부든 사랑이든.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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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의중은 숨기면서 다른 사람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마음 자체가 이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