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idea

lillovewithbiglust2 2024.09.27~2024.11.30

lillovewithbiglust 2024. 12. 1.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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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도대체. 뭘까??
난 왜 꿈에서 비소를 생각했을까
난 화학을 아는것도 아니고
비소 라는것도 일상생활에서 써본적도 없고 들어본적도 없는 용어인데
꿈에서 난 비소를 먹으면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비소를 찾아다녔다
무의식의 세계는 참 희한하다
비소가 왜 머리에 날아들어서 꿈에 나온걸까
난 비소라는걸 들어본적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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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비소를 계속 생각함 난 비소가 뭔지 모름 근데 꿈에서 나는 비소 라는 걸 계속 생각함
나, 할머니,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꿈에서) 이렇게 셋이 있었는데 무슨 이유때문에
셋다 비소가 들어있는 사탕을 갖고 있고 자살하기로 함
할머니 먼저 먹고, 바로 죽음
남자 그다음 먹고 죽음
나도 그다음으로 사탕 먹었는데
괴롭긴 괴로운데 죽어야하는데 안죽음
그래서 너무 고통스러운 거임
난 이미 죽을만큼 괴로운 고통을 맛봐서 다시
시도할 용기는 없는데, 죽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는 없어졌어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이제 사랑하는 사람은 다 죽엇어
그게 너무 고통스러워 근데 죽을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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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
미치도록 풀고싶은 문제
풀지 않고 덮어두고 살아갈 수 없는 문제
도저히 시선을 돌려버리고
없던 일인것처럼 할 수 없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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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많음. 생각의 많음은 혼란이다.
생각은 많아도 그 혼란을 남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덤덤하고 간결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참 매력있다는 생각이 들고, 요란하게 표현하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안쓰러워서 마음이 가기까지 하는것 같다. 그런데 참 드문 매력이다.
보통은 요란하거나, 아예 숨겨서 드러내지 않거나.
절제의 표현은 요즘 세상에 사라진 미덕같다.
나부터도 절제에서 엉망인 인간
회피를 밥먹듯 하는 인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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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걸 남한테 증명해보라고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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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이 말을 1.25배속으로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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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문자 그만 보내고 제설을 쳐 해라 진짜
무정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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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very paradox. 경영, 특히 마케팅 분야에서 서비스 복구와 관련하여 쓰이는 용어인데, 한 번 기업에 실망하고 만족스러운 복구를 경험한 고객은 실망한 경험이 없는 고객보다 그 기업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현상을 나타내는 용어로, 복구의 역설이라고도 한다. 기업이 실패를 딛고 성공적인 복구를 해내면, 고객은 실패를 경험하기 이전보다 더욱 충성스러운 고객이 된다.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관계마케팅(CRM)의 일환. 인간관계도 비슷하다. 한번 삐그덕거리는 경험을 하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대화하고 맞춰가는 경험을 하며 관계가 더 돈독해진다. 고객은 기업을 사람처럼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제품이 아닌 서비스와 관련하여서 더더욱 그렇게 평가하는데, 이건 서비스가 기억을 남기는 상품이라 그렇다. 사람에게 그러하듯 기업을 신뢰하거나, 배신감을 느끼거나, 실망하거나, 동반자처럼 의지하거나, 사랑한다. 결국 좋은 경영자는 사람을 잘 알고, 다룰줄 아는 경영자다.
 
 

해변? 계단 많은 해변
수치스러움
앞머리 있는 남자
비닐봉지 안에 아기
얼굴 없는 친척들
갈팡질팡
뭔가 잘못됨
창문으로 엿보기 (무서움)
할머니 최후의 보루
 

애드 아스트라

5년전 개봉했을 때 대구에서 H와 봤던 영화.
좋은 영화는 잔상을 남기고 시간이 흘러도 계속해서 내게 질문 해온다.
Why go on? Why keep trying?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 트라우마 극복의 시작. - 첫 관람 직후 남겼던 메모.
지금 다시 본다면, 아마 여러 다른 생각이 들것 같다. 왜 계속 떠오르는 걸까? 내게 뭔가 할 말이 남은 걸까?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많이 봤지만 크게 마음에 남은 것이 없는데(2001스페이스오디세이,그래비티,인터스텔라,마션,라이프,패신저스,우주전쟁) 어라이벌과 애드 아스트라는 정말 오래 기억에 남아 계속해서 마음에 파동을 일으킨다.
두 영화의 공통점이 뭔가 생각해보면,
우주라는 막연하고 광활한 공간을 배경으로
인간 마음이라는 가장 국소적이고 특수한 부분을 드러낸다는 특징이 있는 것 같다.
하여튼, 시험공부를 하다 갑자기 떠올랐는데
머지 않은 시일 내에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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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경험상품=기억상품
서비스는 결국 기억을 남기는 상품
좋은 서비스란, 좋은 기억을 남기는 상품
e.g. 호텔, 영화, 여행상품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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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가 좋으면 그 사람 죽는 꿈을 무조건 한번은 꾸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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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내 꿈에서 너무 많이 죽어서
그때마다 니가 죽고 없는 허한 느낌이 항상 진짜 같아서 놀라면서 일어났는데
이게 진짜가 될 순간이 반드시 오겠구나
연습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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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그만 좀 증명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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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주장하거나 증명할 필요도,
나와 나의 과거를 부정할 필요도,
내가 나라서 미안할 필요도 없는
그런 관계가 내게 가능할까?
인간은 끊임없는 실망이라고
내 인생의 역사가 내게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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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안먹은지 몇 달이나 됐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수면제 먹지 않은지는 그보다 오래됐다.
여전히 통잠은 못자고 자주 깨서 뒤척이거나 악몽을 꾸지만 약 없이 잠오는 감각이 소중하다.
그래서 지금 난 그냥 괜찮은 것 같다.
다시 괜찮지 않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래도 또 괜찮은 순간이 오겠지.
한가지 확실한 건, 끝은 아직 멀었다는 거다.
내가 그렇게 느낀다.
여기가 끝은 아니야.
난 내 삶이 망가졌다고 생각했었다.
엉망으로 끝난 여러번의 연애.
한 번의 낙태.
수많은 자살시도와 입원.
내 손으로 더 망가트리려고도 했었다.
망가트리려고 기를 쓸 때마다 느꼈다.
나는 아직 망하지 않았다는 걸.
“여기서, 얼마나, 뭘, 더.”
내가 노트에 자주 적곤 했던 네 단어다.
여기서 얼마나 뭘 더 해야 진짜 끝에 다다를 수 있냐고,
얼마나 더 망쳐야 완전히 망하게 되는 거냐고
저주를 퍼붓는 심정으로 간신히 적었던 네 단어.
지금은 내가 그렇게 기를 쓰고 망하려 했어도
완전히 망하지 않았음에 감사하다.
끝은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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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했던 그와 나를 기만한 그는 같은 사람이다.
친절하고 비열할 수 있다.
다정하고 잔인할 수 있다.
진실하고 천박할 수 있다.
그게 사람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게 내 타고난 천성이니까.
이해하기 힘들수록 오래 들여다보는 것이 내 본질이니까.
떼어낼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너무 쉽다.
괴물이라고 말하기는 너무 쉽다.
너무 쉬운 그 말은 쉬워서 아무 의미가 없다.
쉬워서, 아무 힘도 없다.
그는 괴물도 악마도 아닌 사람이어서 나를 기만했다.
나는 그가 그저 사람인 것을
괴물도 악마도 아닌 사람인 것을
인정하려 한다.
이해를 선행하지 않은 그런 인정을, 하려한다.
그는 나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해하려 애쓰는 대상은 결코 기만할 수 없으니까.
그는 여태 그랬듯 앞으로도 쉬운 인생을 살 것이다.
나는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게 헛된 일인걸 알면서도.
하지만 다시 애쓸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절대로 그와 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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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는 내가 겪은 일 때문에 나한테 잘해주는 거예요?
잘해주는 게 아니라 걱정하고 아끼는 거야.
너무 노력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노력해야 해. 이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은 노력해야 해. 소중한 존재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래야 해.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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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는다. 잊지 않는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나를 알았고 나를 좋아했지만 더이상 아무 교류도 없는 사람은 내가 자기를 잊지 않기를 바랄까? 잊지 않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계속 생각한다면 잊지 않은 걸까.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생각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내가 계속 생각한다 한들, 내가 생각한다는 건 나만 아는 사실일텐데 그렇다면 내가 그 사람을 잊지 않은 게 상대 입장에서 무슨 의미가 있나. 결국 인연이란 건 얼굴을 보고, 실없는 말이라도 주고받고, 눈을 맞추고, 살을 부비고 그래야 이어진다. 잊지 않는다는 건 내 생각의 감옥에 그 사람을 가둬두는 게 아니라, 내 눈과 귀, 살로 그 사람을 감각하는 것. 그 사람을 보고, 듣고, 만지는 것. 최근에 오랜 친구들을 연달아 만났다. 수현이는 내 생일마다 안부 인사를 해오는데 아마 카톡에 떠서 그런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본 것이 21년 여름, 수현이가 나를 보러 진주에 온 것이니까 꽤 오래됐다. 우리는 그때 같이 영화 블랙 위도우를 봤다. 오프닝 시퀀스에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 커버곡이 쓰였는데 음울한 영상과 잘 맞아떨어졌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천황식당에서 육회비빔밥을 먹고, 저녁에는 파머스에서 칵테일을 마셨다. 그 시간이 즐겁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우리는 어째선지 여태까지 만나지 않았다. 작년 생일에도 안부 문자가 왔고, 올해 생일에도 문자가 왔다. 그러다 수현이가 서울에 있으면 얼굴 보자고 했다. 그렇게 건대에서 만나서 밥 먹고, 카페에서 밀렸던 수다를 한참을 떨었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어색하거나 낯가리게 되는 건 없었다. 수현이는 항상 수현이. 고등학생 때부터 늘 유쾌하고, 솔직하고, 매력적인 친구. 막차 시간이 다 되어 지하철역 근처에서 배웅하는데 수현이가 그랬다. 우리 연말에 또 보자. 그때도 재밌는 거 하자. 그렇게 말하는 수현이 눈빛이 반짝거려서, 어쩐지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오늘 참 좋았다, 그리고 나에겐 좀 더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안으로 한없이 파고드는 것도 물론 좋지만, 애써 바깥을 외면하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조금 삐딱한 마음으로나마,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실제적으로 오고가는 감각이 있어야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인정했다. 내 머릿 속에서 그 사람을 가지고 아무리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걸 서른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알아서 여지껏 사춘기 소녀마냥 지냈던 것이 친구들에게 미안해진다. 이런 나를 참아주고 계속 관계를 유지해준 친구들한테 고맙기도 하다. 어떤 철학이나 생각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마음보다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 절실히, 절대적으로.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을 잊지 않길 원한다면 내가 그 사람에게 실제적인 무언가가 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나도 좀더 다가가고 좀더 마음을 연 채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쓰면서 이 글을 끝마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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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소(제발)
- 파스타, 볶음밥 만들어서 소분 냉동
- 요리수첩만들기
- 서독제/씨네큐브프리미어 일정조율(20일전까지)
- 기말공부
- 옷 드라이 맡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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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지기 전까지 문은 벽과 다름 없지.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주저하면서도 용감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막힌 벽이라며 발걸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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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엉망진창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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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허수경, 혼자가는 먼 집
당신이 없을 때 당신의 아름다움은 내게 금방 울 것 같은 눈물 어린 아름다움이다. 나는 병자처럼 당신을 묻은 마음의 무덤에, 당신의 없음을 추모하러 음식도 없이 술 한 병만 가지고 벌초하러 간다. 당신이 나를 두고 먼저 당도해있는 그 곳은 또한 내가 도착해야 할 집이므로 그 곳은 혼자가는 먼 집이다. 그러나 나는 그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얼마나 걸리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가야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참혹할 수밖에. 너무 큰 절망은 병적인 유머를 불러오고 그래서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킥킥,’ 그리고 당신. 환후(병)와 치병(병을 다스림)은 별개이기에, 당신이라는 병을 한바탕 앓고 지나온 아직도 환부는 따끔거린다. 그러나 나는 내 병이 아니고 당신은 내가 아니기에 나는 당신을 버릴 수조차 없다. 이미 벌어진 참혹을 무를 수도 없다. 그러나 자꾸만 새어나오는 웃음은,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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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할 때, 진실 역시 어리석음에게서 영향을 받아 변화할까요.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이 진실을 파괴할 때, 어리석음에도 균열이 생겨 함께 부서질까요. 내 어리석음이 사랑을 파괴했을 때, 그렇게 내 어리석음 역시 함께 부서졌다고 말하면 당신은 궤변이라고 말하겠습니까.
/한강, 희랍어시간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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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들이 결국 죽기에,
내 마음 속에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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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뭔가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걸 묻어두고 살 수 있는 성격은 못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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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don’t know how to talk
but damn we know how to f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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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을 강제하는 쪽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이때 선택은 좋은 쪽이든 안좋은 쪽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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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눈은 어른의 눈이 보지 못하는 걸 꿰뚫어볼 때가 있고 (단순해서? 편견이 덜해서? 아니면 표면을 가장 표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내가 텅 빈 사람이라는 걸 들켰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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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기적 같은 소리 다 집어치우고
가르델은 왜 눈을 감는가?
이것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자
영화의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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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pc가 결국 트럼프 당선으로 이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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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집에 가고 싶다 씨발 싹다 고백투유어컨트리 해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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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어요
왜 이렇게 됐어야만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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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슬퍼지면, 눈물도 안나면서
괜히 코 한 번 훌쩍 거리는 게 버릇이 된 것 같다.
가끔은 정말 목놓아 울고 싶은데
혼자서는 어떻게 우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괜히 책이나 영화에 기대어 이때다 싶어 오롯이 내 것 아닌 눈물 쏟는 일이 잦아지는 것 같다.
무섭다 할머니 죽음, 내 죽음.
이 두려움에 내가 좀 병적으로 집착하고 매여있는 것 같다. 요즘 약물치료 말고, 심리상담을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끝은 뭐든지 싫다.
관계의 끝도 싫고 영화의 끝도 싫고 사람의 끝도 싫고 끝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
그냥 시작조차 안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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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애프터양
기억의 시점쇼트.
your existence matters to me and that makes me hurt.
기억을 가진 존재는 모두 영혼이 있고, 영혼을 가진 존재는 모두 소중하다.
인간을 구성하고, 인간을 다른 인간에게 소중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요소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는듯 했던 영화.
릴리슈슈 레퍼런스는 그냥 감독이 좋아해서 한건가?
아주 인상깊은 구석은 없었지만, 극장에 나와서 기존의 감각이 새롭게 느껴지는 경험.
3.5/5.0
10/20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짧은 시놉시스와 트레일러에서도 진하게 풍겨져 오던 불행의 냄새 때문에, 좋다는 반응과 주변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멀리했던 작품. 오늘 연이 닿아 매진이었는데도 선착순 자리(빈백)에 앉아 보게 됐다.
보는 내내 임솔아의 ‘최선의 삶’이라는 전에 읽었던 소설 한 권이 생각났다. 등장인물들은 힘들어서 힘들고, 가난해서 가난하다. 그들은 밑도끝도 없이 불행하고 그 불행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 영화도 그랬다. 주인공들은 밑도끝도 없이 불행해서 불행하고, 악해서 악하고,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이 밑도끝도 없는 불행을 보면서 나는 이걸 왜 보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너무나 불행하다 못해 그 불행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고, 거기서 아름다움까지 찾으려는 그런 내용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거기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겠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이렇게 밑도끝도 없는 불행이 아름답게 이미지나 텍스트로 포장된 걸 불행 포르노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책(텍스트)이면 그래도 문체나 문장의 아름다움이라도 건져낼 수 있는데, 이미지면 그냥 한없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누군가는 내가 텍스트에서 아름다움을 건져내듯 이미지에서 그런 걸 건져내고 거기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는 거니까 이건 취향의 차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어떤 작품이 좋았다고 말하는 것보다 신중해야 할 일은 어떤 작품(누군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을)이 별로라고 말하는 일인데, 그래서 나는 어떤 작품이 별로일 때 좀더 작품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고, 자료도 많이 찾아보는 편이다.
이 영화는 감독이 영화로 제작하기 전에 소설로 먼저 썼다는데 영화와 소설이 다른 점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호시노가 갑자기 돌변하는 이유도 영화와 소설은 설정이 다른데 나는 개인적으로 소설의 설정이 조금 더 맘에 들었다. 소설의 설정이 삶의 덧없음이나 허무함으로 한 인간이 돌변하는 것을 설명하기에 더 적합하지 않았나 싶다.
1. 영화라는 플랫폼을 통해서만 가능하거나, 적어도 영화라는 플랫폼이었기에 다른 플랫폼(소설, 연극 등)보다 나은 점이 있는가? - 나는 이게 텍스트였으면 좀더 공감이 되거나, 적어도 뭔가 더 건져낼 수 있었을 것 같다.
2. 밑도끝도 없이 ‘분위기’만 자아내는 영화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그게 불행에 관한 거라면 더더욱. 그런데 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이유로 꼽는 것이 바로 그 ‘분위기’인 것으로 보아 그냥 취향의 차이지 싶다.
3.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데, 왕가위 영화가 스쳐지나간다. 왕가위도 감각적인 연출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인데 나는 아비정전은 좀 싫어하긴 해도 화양연화 같은 것은 또 좋게 봤단 말이지. 사실 그것도 ‘분위기영화’인데 그건 공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차이를 내가 느낀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4. 봤다는 것에 -적어도 더 궁금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에- 만족한다. 그리고 초록 들판, 검은 화면위로 텍스트가 쏟아지고 타자기 소리 들리던 오프닝시퀀스는 인상에 남는다. 에무 빈백은 다시는 안 앉아! 허리아파 죽는줄.
3.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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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matters is time, not ti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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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은 가장 슬픈 종류의 행복이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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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독립영화제2024
11/28-12/6
풍류일대(지아장커)
해피엔드(소라네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파얄 카파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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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올라가는 버스 안
할머니 전화와서
우리 새끼 신경 못써줘서 미안해
나는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낀건지 짐작도 안간다
사랑은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구나
할머니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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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것은 어떤 분위기의 휩쓸림도 없이, 내가 사랑하는 것을 내 의지로 하며 그 때에 방해받지 않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결론에 차분히 이르는 것. 이것을 위해서는 결코 주위에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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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물론 중요하지만
기록이 내가 만나는 세계를 앞서가지 않도록
기록은 언제나 내가 마주하는 세계
안에 있도록 하자.
실제로 세계 안에서 만족스러울 때 나는 글을 거의 쓰지 않고 그 세계를 충분히 즐기는 것 같다.
그러다 무언가 불만족스럽거나 절망을 맞닥뜨리면 그제서 글로 피신 온다.
내가 세계와 하나의 리듬으로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평온했던 주말.
이 리듬으로 이번 한주도 의연하게 힘을 잃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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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내가 열심히 쓰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내 안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말은 이만하면 됐어.
이제 세계를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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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에도 중요성을 두지 않는 것은 절망의 유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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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낮잠 실컷 자고 일어나서 별 다섯개 달린 티원 뱃지 주문하고, 저녁에는 가족들과 초밥 먹고 왔다. 할머니가 고구마 삶아서 쟁반째로 들고오자 강아지들 곁에 모여 앉고 할머니 고구마 호호 불어가며 강아지들 주다. 나는 그 광경 영상으로 찍었다. 저녁에는 SIPFF랑 그 외 영화 이것저것 예매하고, 옷 몇벌 주문하고, 마당에 앉아서 멍하니 음악들었다. 덕배가 내가 어딜가든 따라온다. 행복과 다정으로 충만했던 하루. 내일 다시 서울 가야하지만 저번처럼 울지 않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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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조커: 폴리 아 되 3.0/5.0
10/2 펄프 픽션 4.0/5.0
10/4 와일드 로봇 3.0/5.0
10/5 타인의 삶 3.5/5.0
10/7 레드 룸스 4.0/5.0
10/9 우나기 3.5/5.0
10/11 할머니가 죽기 전 백만장자가 되는 법 2.5/5.0
10/15 악이 도사리고 있을 때 2.0/5.0
10/20 애프터 양 3.5/5.0
10/20 릴리 슈슈의 모든 것 3.0/5.0
10/21 부부의 거처 4.0/5.0
10/23 룸 넥스트 도어 4.5/5.0
10/25 달팽이의 회고록 3.5/5.0
10/25 락 바텀 3.0/5.0
10/31 롱레그스 3.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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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w did you figure it out?
- I looked long en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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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외로움을 구분하는 일은 중요해보인다. 둘의 공통점은 ‘홀로’ 존재한다는 것이지만, 성질과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고독을 ‘two-in-one(하나 속의 둘)’이라고 했다. 이것은 홀로 있으되 내 자신과 함께 있는 상태로서 둘이라는 뜻이다. 고독이란 홀로 있으면서 내 자신과 함께 있는 상태, 그러므로 홀로 완전한 상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외로움은 어떤 상태일까. 외로움은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려와 내 식으로 표현하면 ‘one-in-everyone(모두 속의 하나)’이다. 고독과 마찬가지로 홀로인 상태지만, 이때 스스로의 상태에 대한 비교대상은 내 안이 아닌 밖을 향하고, 홀로 있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된다. 즉, 고독은 홀로 있는 상태로서 인식의 방향이 자기 안을 향하는 것이고, 외로움은 홀로 있는 상태에서 자기 밖의 모든 것을 분명히 인식하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외로울 때 어떻게 해야할까?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은 외로움을 더욱 견고히 하겠다는 자멸행위와도 마찬가지다. 그럴수록 혼자인 자신을 처절히 인식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결국 사람은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자기 안으로 파고들어 가야한다. 거기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 마침내 ‘two-in-one’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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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롭다.
그러나 외로움이 두렵지는 않다.
내가 외롭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외로워 죽겠다’가 아니라
그냥 ‘외롭다’는 사실을 뜻할 뿐이다.
내 외로움은 가볍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외로워 죽겠다’를 몇번을 거쳤는지
죽을듯한 외로움,
정말 콱 죽어버리고 싶은 외로움.
그러나 지금 내 외로움은
가을바람 만큼이나 가볍고, 부드럽고,
온화하다.
나는 지금 내 외로움이 아주 맘에 든다.
그리고 부디 오래 그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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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면 좋겠으나
꼭 봐야만 하는가? 그건 아니니…
우연에 기댈 수밖에.
우연에 기대며 하루하루
내가 나를 놓지 않고
성실히, 그리고 명랑히
막연한 기대로 살아가다보면
그 끝에 선물처럼 찾아오는 사람이길.
이렇게 적을 수밖에.
이렇게 바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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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본 영화 정리하는데 열편도 안 본줄 알았는데 오늘 예매해둔 것까지 15편이나 봤다. 그만큼 휘발성 강한 작품만 본 건지 아니면 내가 그만큼 깊게 감각하지 못한 건지 잘 모르겠다. 이번달에는 온전히 쉬었다는 기분이 드는 날이 하루도 없었던 것같다. 학원 학기 바뀌며 레테때문에 바빴고 중간과제 제출하느라 정신없었다. 약속도 많아서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라 바빴다. 중간중간 짬내서 열심히 영화 보러 다녔는데 별로 남는 것이 없는것 같아서 어딘가 헛헛하고 불만족스러웠던 한달. 한달동안 취해있다가 숙취에 절어서 이제야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기분이다. 나는 정말 바쁘게 사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고 소모된다는 느낌이 강한데, 시간이 많다고 해도 혼자서 온전히 쉬는 걸 잘 못하겠다. 어디든 뭐라도 해야할것 같고 발걸음을 옮겨야만 할것 같고. 출근 전에 병원 갔다가, 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 카페에 왔다. 두시간 좀 안되게 여유가 있는데 뭘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약은 수면 보조 용도로 쎄로켈만 유지하기로 하고 조울증약은 끊어보기로 했다. 단약하고자 하는 내 의지가 강하다면 의사가 강권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나 어디로 가는걸까? 어디로 가고 있어? 잘 모르겠다. 근데 내가 모르면 누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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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허무주의자들이 영화 참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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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자랑이 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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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찾아낸 곳에 부지런히 일기를 옮기고 있다. 처음엔 이런 글도 썼구나 추억팔이 하며 재밌었는데 하다가 하다가 씨발 너무 많아서 힘들다.. 지금 드는 생각은 첫번째로 내가 할 말이 존나게 많았구나. 두번째로는 내가 별로 달라진게 없구나. 이십대 초반 했던 생각들이 확장되거나 아니면 좀더 구체적이 될 뿐이고 큰 틀이 변한 부분이 없어서 좀 신기했다. 결국 그때 뿌렸던 씨들로 평생을 먹고 사는구나 싶네. 근데 이것도 또 할말이고 옮겨야 되는 일기고 씨부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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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뢰한 재개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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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일하다.
준이랑 술먹다.
술먹으면서 티원 경기보다.
이겨서 존나 만세하고 박수치고 난리부리다.
피방에서 롤하다.
인터넷 안끊어도 된다.
티원 존나 사랑해.
재밌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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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가는 마지막 길이 끊어지는 것 같다.
‘우리’가 마침내 소멸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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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저 짓 안봐도 되는건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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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다만 발견한 것을 욕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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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이렇게까지 심란할 줄이야
 
 

어디로 가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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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V 아트하우스기획전 ~11/26:더폴, 아네트, 플프, 너와나, 우리들, 파수꾼, 그을린사랑, 아무르
SIPFF 11/7~11/13
서아시 캐나다영화제 11/7~11/20
빅토르 에리세 회고전 12/11~12/22
오다 카오리 기획전 11/9~11/10
컨택트 재개봉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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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고 즐겁고 자유로운 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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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라고 대답해야만 하는 상황보다, ‘예’든 ‘아니오’든 어떤 대답이든 해야만 하는 상황이 더 싫다. 회사가 나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강요하는 것은 특정한 일이나 작업물, 눈에 보이는 결과가 아니라 대답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질문을 받든, 어떤 대답이라도 내놓을 것. 대답해야만 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질문은 일종의 권력이고, 대답하는 사람의 대답은 그것이 ‘아니오’라고 해도 결국 굴종이다. 질문자가 원하는 것은 ‘예’라는 대답이 아닌, 대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관계가 자유로운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대답하지 않을 자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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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많이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타인 이야기’ 듣는 경험이 오직 ‘자기 이야기’ 증폭시켜주는 장치로만 작동하는 것도 역시 문제라는 생각. 어떤 사람은 ‘타인 이야기’에서도 ‘자기’를 본다. 이때 타인의 이야기는 더이상 타인의 것이 아니고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전락한다. 이것은 청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악질적인 방법. 타인의 이야기마저 뺏어와 자신의 삶에 살을 붙이는 용도로 쓰는 것. 그런데 그런 식으로 듣고, 쓰고, 만드는 사람들은 본인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세상 모든 것에서 ‘자기’만 발견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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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입(동화)과 감정분리(비판)가 같이 가야 하는데, 문제는 비판으로 가려면 이입을 먼저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비판도 순수한 비판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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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이야기’ 하는 쾌락이 ‘타인의 이야기’ 듣는 쾌락을 넘어서면 안 된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도 결국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경험이다. 그러니까 꾸준히 읽고 꾸준히 봐야된다. 너무 많은 자기 안의 말은 타인의 귀만 피곤하게 하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삭막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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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존재하는 한 존재와 부재 차이는 종이 한 장 보다 희끄무레하다. 당신은 분명 부재하지만 당신이 존재한다 한들 내 기억 속의 당신만큼이나 선명할까. 진정한 부재는 기억의 소멸에 있다. 그런데 그때가 되면 당신 뿐만 아니라, 나도 없다. 당신의 소멸. 나의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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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행위를 통해 아무것도 되찾을 수는 없지만 모든 것을 (교묘한) 가능의 영역으로 회부할수는 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쓴다. 나에 대해. 당신에 대해. 그리고 우리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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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안에서 진짜 절망을 만난 사람은 그것에 대해 타인에게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 행위가 스스로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것임을 무의식중에 알기 때문이다. 또한 진정 아파하는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에게 여지간해선 전달되지 않는다. 아픔은 귀가 아니라 동일한 아픔으로만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둠은 빛을 알지만, 빛은 어둠을 모른다. 어둠에 선 채로 빛에 있는 사람에게 어둠을 가르쳐줄 수는 없다. 빛 쪽에 있던 사람이 어둠으로 걸어들어오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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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줄 사람은 알아줄 것이다.
그렇게 밖에 말할 수가 없다.
모르면 그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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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이란 대화가 아니라
한 존재가 자기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다른 존재를 그저 만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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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긴 글은 못 적는다.
대신 시라고 할 수는 없고
시의 형식을 빌린 짧은 글을 많이 쓴다.
문장 모음이라고 해야할지
단어 묶음이라고 해야할지
그런 글이라고 하기 애매한 무언가
메모같은 글을 많이 쓴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몇 달 치 기억이
뭉텅이로 날아가는 경험을 자주 하고
이어지지 않는 듬성듬성한 기억들 사이에서
떨어트린 물건을 재빨리 줍듯이
머리속에 날아든 단어들을 순간적으로 낚아채서
글로 옮겨놓는다.
나는 지금 살기 위해 잊어버리는 중이다.
퇴화하는 중이다.
사람이 고통에 너무 오래 노출되면
정신을 임의로 셧다운 시킨다고 한다.
고통을 없앨 수 없다면
고통을 느끼는 스스로의 정신을 꺼버린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길게 쓴 일기가 메모장에 담긴 칠월의 일기인데 이마저도 완성은 안되어있다.
2024.07.24
최근 서울에는 계속 비가 내렸다.
잠시 맑아지는가 싶으면 이내 하늘이 회색빛으로 변하더니 실비와 장대비가 번갈아 내렸다. 나는 종일 집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빈둥거리거나 이따금 책장에서 아무 시집이나 꺼내 필사를 했다. 그마저 지루해지면 심야로 영화를 보러 가거나 늦저녁 해가 완전히 진 다음에서야 공원에 나가 검은 한강물을 한참 들여다봤다. 한강물이 반사하는 얼굴들을 봤다. 내게 손 흔들어 인사하는 얼굴도 봤다. 그러나 종국에는 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왜 나는 계속 서울에 있는 걸까? 왜 나는 계속… 있는 걸까? 하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우울에 압도 당해 며칠을 멍하니 보냈다. 무엇을 먹거나 마셔도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고 몸을 움직이거나 걸을 때는 괴이한 위화감에 화들짝 놀라곤 했다. 자극이 있은 후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야 반응이 오는 유아기 아이처럼, 자기에게 팔이나 다리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놀라곤 하는 신생아처럼 내가 살아있음을 감각할 때마다 소스라치곤 했다. 이틀 전 날짜로 새벽 두시 사십삼분 다음과 같은 메모가 핸드폰에 적혀 있었지만 기억에는 없다.
거기 있는지
거기 있는 게 맞다면 왜 침묵하는지
내가 언제까지 당신 침묵에서 짐작으로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지
나는 언제 편해질 수 있는지
침묵하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고, 내가 침묵 속에서 짐작으로 읽어낸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쓴 것이 분명한 그 메모가 내 마음을 따끔거리게 했다. 타인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도 괴롭지만 나 자신을 해석하고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더한 괴로움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어설픈 사람은 스스로에 대한 그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나와 대화가 통하거나, 적어도 나를 잘 아는 벗이 이 닭장 같은 도시에 한 명만 있어도 이렇게까지 우울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오해하고 나 자신조차 나를 오해해도 나를 이해해주는 한 사람
악몽 속에서는 누구나 혼자다. 나는 며칠 동안 눈을 뜨고 있든 감고 있든 철저히 혼자만의 악몽 속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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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선물받으면 기분이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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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서 지옥을 본다면 그건 당신의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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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킬레스건은
'사람'을 '사랑'으로 착각한다는 것
/ 전동균,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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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와 통증
네가 바라는 게 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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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슬픈 것 같아
조금 의심하는 것 같아
그러나 그게 병은 아니지
읽을 수 없는 것을 읽어내려 하고
읽어내야 하는 것은 읽지 못하는 것 같아
하지만 그것도 병은 아니지
모든 게 다 지루하지?
다행이야 지루할 만큼
견뎌내기 쉬운 세상에 있다는 것
깊게 생각하지 않을래
오늘의 고민은 내일의 고민이
성실히 지워나갈 것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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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려야 찾아오는 관계의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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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극우는 각각 종말로 가는 길인데, 그 둘이 손잡고 나란히 발맞춰 걸어가는 게 지금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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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ntly, I’ve been away from the world
but mostly, I’ve been away from myself
and I’m happier than ever
wish I could explain it b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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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망하면 또 얼마나 망하겠니?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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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가고싶은 길이 있는데, 자신이 없어서 곁길을 걷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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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브레인포그인지, 아니면 정상인들의 ‘아무 생각 없음’인지 구분이 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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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시작과 끝은 모두 자신의 고독을 발견할 때 당황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라 브뤼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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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such a beautiful day - viemo (너무도 아름다운 날)
Alice (1988) - 유튜브
Boy and the World
Flugt (나의 집은 어디인가)
아노말리사
일루셔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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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적 상태란 완벽하게 있어야할 것만 있는 상태. 그런 점에서 모든 게 시가 될 수 있다. 신문기사도 시가 될 수 있고, 칼럼도 시가 될 수 있고, 영화도 시가 될 수 있고, 음악도 시가 될 수 있다. 적어도 시적 상태에 다다를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응준은 모든 문장이 시적상태에 다다른 작가.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남겨 고통의 원형에 가장 근접하게 닿아있는 사람. 가장 아픈 문장을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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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기 전에 어서 너를 떠올리고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의심하는
인간의 가장 비천한 순간에 너를 한 번 더 그리워한다라…
어떻게 저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사실 저 상황에 닿아본 인간은 많겠지만
자기를 완전 발가벗겨서 글에 담을 용기
또한 의연할 용기(그대로 글로 옮겨올 용기)는 정말 타고난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재능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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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기 전에
나는
어서 너를 떠올려야지
새벽이 목마르고 영원이 썩었는데
다시 눈 뜰 수 있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의심하고 있는
인간의 가장 비천한 순간에
나는
너를 한 번 더 그리워해야지
/ 이응준, 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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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이병률,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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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 existence matters to me
and that makes me h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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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시점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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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서 할 일.
「믹의 지름길」 관람 후기 마저 쓰기.
비빔면에 대패삼겹살 구워서 끝내주게 맛있는 한끼 먹기.
에무시네마에서 「애프터 양」과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연달아 보며 살아있는 건 얼마나 멋있고 다채로운 일인지 다시 깨닫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Glide와 空虚な石 들으며 살아서 영화 보고 음악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하기.
(시간이 된다면) 맛있는 커피와 디저트 먹기.
인생의 역사 한 단원 읽기.
취미와예술 물류관리 각각 2강씩 듣기.
자책과 불안으로 날리기에 주말은 소중하다.
あなたに會う喜び あなたに會う切なさより苦しいのは
당신을 만난 기쁨 당신을 만난 슬픔보다 괴로운 것은
まだ私の心の中に 空虛な石が?むから
아직 나의 마음 속에 공허한 돌이 숨어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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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은 축축하다는 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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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타오기만 하고 안먹은지 이주일째
평온하고 별다른 감정기복도 없다
단약해도 될까?
평생 약 먹으며 살아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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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밑바닥에서, 가장 어두운 어둠 속에서 붙들고 있었던 하나.
그게 당신을 설명한다.
그게 곧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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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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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갑자기 인형을 뽑아준다고 난리쳤다. 난 그거 다 상술이라고 했다. K는 실력이라고 했다. 삼천원, 오천원, 만원… 지금부터는 도박이니까 하지말라고 말렸는데 기어코 사만원을 꼬라박았다. 결국 못뽑았다. K는 뽑을 때까지 할거라 했고 나는 그런 K를 가게에서 끌고 나오다시피 해야 했다. K가 쿠팡에서 똑같은 키링을 찾아내서 학원으로 배송시켜줬다. 만원에 팔고 있었다고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돈낭비냐고 했다. K는 껄껄 웃으면서 안 샀으면 허투루 쓴 돈이지만 결국 사서 너에게 안겨줬으니 그걸로 된거지. 넌 오만원짜리 키링을 가진 거야. 그중 사만원은 낭만 값이고. 라고 했다. 결국 난 사연 많은 도합 오만원짜리 키링을 갖게 됐다. K한테 넌 도박도 주식도 하지 말라고 했다. 패가망신할 스타일이라고. K는 맞다면서 주식앱을 열어 보여줬다. 온통 파란불이었다. 한창 제주살이 붐일 때 제주항공 사고, 상한가에 삼전 샀다고 했다. 바보같은 K. 나랑 너무 다른 K. 그래서 재밌는 K. 어쨌든 이 키링이 나한테 제일 소중한 키링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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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진이가 학원에 찾아왔다. 처음엔 교복을 입은 애가 들어와서 관을 잘못 찾아왔나 싶었는데, 나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너 누구니? 저 우진이요. 아 신우진! 하고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초5때 처음 봤는데 벌써 중학생이 되어서 키가 181이나 된다고 한다. 내가 그만둔줄 알았는데 지나가다 보여서 와봤다고 했다. 바로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해졌다. 분명 내 눈높이 정도 키였는데 2년만에 훌쩍 커서 내가 올려다봐야할 정도가 되었다. 목소리도 변하고, 완전히 다른 아이 같았다. 너 언제 이렇게 키가 컸어? 어른같다 우진아.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겠다. 우진이는 그냥 허허 웃었다. 원래도 어른스러운 아이였는데, 더 의젓해진 것 같다. 자주 놀러오라고 했다. 운동하다 골반을 다쳐서 지금은 학원을 쉬고있다고 했다. 완전 농땡이네? 그렇죠. 그러면서 또 허허 웃는 아이. 가끔 이렇게 아이들이 찾아와주면 정말 반갑고 고맙다. 특히 기대도 안했던 아이들이 찾아와주면 더 그렇다. 아이들은 참 빨리 큰다는 생각을 오늘 또 했다. 부디 다들 멋진 어른으로 자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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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see me like no other
and I think I like your point of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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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소한 다정함이 오래 기억에 남아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나를 일으켜 세울 때가 있다.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면 선생님에게 받았던 다정함이 많이 남아있다. 펑펑 우는 나를 안아서 달래줬던 학원 선생님. 자퇴하기로 맘먹고 등교하지 않자 집까지 찾아와 나를 설득했던 선생님. 성적보다 선한 마음씨가 가장 예쁘다고 말해줬던 담임선생님. 그들의 다정함이 직업정신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그런 건 어른이 되어서 학생들을 상대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나도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사소한 다정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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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사랑 앞에 지극히 비이성적인 존재고 이것은 남자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정도다. 여자는 자신이 사랑한다는 결론에 다다르면 어떤 시련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랑으로 인해 자신에게 닥치는 환난을 살아갈 마음의 준비를 한다. 이 사랑이 나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오는가 라는 계산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니체가 여자는 사랑앞에 자신을 내던지고, 남자는 그것으로 자신을 풍부하게 만든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위협하고, 자신을 소모하고, 자신을 갈취하고, 심지어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해도 일단 사랑이라는 결론에 다다르면 눈과 귀가 머는 것이 여자의 사랑인 것 같다. 여자는 사랑하면 자신의 존재가 상대에게 녹아들어 그 사람의 일부가 되기 원하고, 남자는 사랑하면 상대가 자기 삶의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 이토록 지향하는 바가 다르니 결코 사랑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 합치하지 못하는 족속, 그것이 남자와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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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들고 싶은 사람.
책처럼, 영화처럼…
가장 어두운 부분과 가장 밝은 하이라이트까지
남김없이 모두 보고싶은
그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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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와 술마시다가, 내가 그랬다. 우리 오십 넘어서도 결혼 안했으면 그때는 같이 살자. 그러자 K가 핸드폰을 꺼내서 녹음 기능을 켜고는 말했다. 그 말 그대로 다시 해봐. 나는 웃으면서 같은 말을 그대로 했다. K의 나에 대한 딱 한가지 불만은 뭘 먼저 하자고 안한다는 것. 연락도 먼저 안하고, 만나자고도 먼저 안하고, 술 먹자 밥 먹자고도 먼저 안하고, 하여튼 먼저 뭘 하자고 하는 법이 없다는 것. 그런 내 입에서 거의 처음으로 나온 먼저 하자는 게 다름 아닌 같이 살자는 말이라고? 그 말 꼭 지키라 했다. 녹음 해뒀으니 법적 효력 어쩌고 하면서. 사실 나도 갑자기 그런 말이 왜 튀어나온지 모르겠다. 세 병 째, 물론 취기도 올랐지만, 그냥 문득 K라면 같이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철없는, 가까운 시일내로 잊혀질 약속,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거대한. 이런 약속 해본 게 언제인지? 그냥 웃었다. 즐거워서. 실없이 즐거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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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가져다주는 행복에는 증분 효익이 없다. 삶의 기본 조건을 충족할 만큼의 소득을 벌고 있다면 그 이상 100을 벌든 1000을 벌든 삶에 대한 만족도나 행복은 동일하다는 뜻이다.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오래된 연구결과로 입증되었으며, 이스털린의 역설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행복도와 소득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론의 주된 내용이다. 나는 아직 그 ‘일정 수준’의 소득에 도달하지 못했고 여전히 자립이 과업으로 남아있지만, 내 미래도 저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돈에 대해 관심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제일 위험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용도 이상으로는 돈에 관심도 없고,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게 많지도 않다. 그냥 먹고 살고, 가끔 마라샹궈 시켜먹고, 보고싶은 영화 실컷 보면서, 인상깊은 영화 포스터나 몇장 주문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이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와 가끔 맛있는 것 나눠먹고, 좋은 시간 보낼 수 있으면 더 바랄 것도 없고. 아, 내가 원하는 일 하며 돈 벌 수 있으면 최고겠지. 이렇게 적고보니 바라는 게 많은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요즘 일과 공부, 취미, 인간관계까지 챙기랴 바쁘다보니 내가 진정 언제 행복한가, 어떻게 행복한가에 대해 많이 생각해본다. 마케팅특강 공부하며 인간 감정과 행복에 대한 이론적 얘기도 이런 생각을 부추긴다. 적어도 지금 나는 괴로운 가운데서도 이상한 평온함과 만족이 있고, 우울한 와중에도 느닷없이 찾아드는 활기가 있다. 돈도 벌고 있고, 공부도 하고 있고, 가끔이지만 친구들과 좋은 시간 보내고, 내가 벌어 내 돈으로 원없이 취미생활 하고. 여기서 가야할 길은 많지만 지금도 행복에는 충분히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또, 능력이 된다면 입양하고 싶다. 굳이 내 유전자를 배출하지 않아도 세상에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가 한 명쯤 있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회개하고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생각이 왜 여기까지 흘러왔을까. 지금은 새벽 한시 반. 나는 24시 카페에서 마지막 남은 마케팅특강 과제하고 있다. 하기 싫다. 출근도 하기 싫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 준이가 카톡 보내온다. BIAF에서 보고싶은 영화 몇개 추려달라 했다. 연의 편지, 걸즈 밴드 크라이, 후레루라고 한다. 나도 검색해봐야지. 그냥 나는 지금 좋은 것 같다. 우울하고 괴로울 때도 많지만 (대다수지만) 보고싶은 영화가 있고, 가고싶은 영화제가 있고, 그걸 같이 가주는 친구가 있고, 제출해야 되는 과제가 있고, 출근해야 되는 회사가 있고, 나를 괴롭게도 하고 행복하게도 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이 단순하고 단단한, 별것없는 행복감. 이런 것을 인지하는 데서 오는 행복감이 나를 자주 치고 지나갔으면 좋겠다. 지금보다 훨씬 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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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biaf 10.25~10.29
존나 까먹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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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매완료
짙은 선홍색(1996)
부부의 거처(1970)
예매해야되는거
지옥의 천사들
 
 

이제야 드는 생각

he’s a big giant bub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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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제작한 포스터가 왔고
조금은 행복?
202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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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 눈으로 잠든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여긴 꿈속이라고
그것도 악몽 속이라고
말해줬던 그 사람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던 발걸음 멈춰세워 말해줬던
그 사람
본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일러줬던 그 사람
세상은 원래
정교하게 잔인해
그러니 우리는 한바탕 춤이나 추자
내 손을 잡고 제자리서 빙그르르 돌렸던
그 사람
어디에 있을까 지금
깨워주는 이 없이 여긴
또다시 꿈속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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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날엔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아무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날엔?
나는 내 눈 앞에 있는 것을 무심코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매번 이해해왔기 때문에
나의 이해를 함부로 쓰고 싶지 않다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
닥치는 대로 이해해왔기 때문에
이해하고 싶지 않은 날은 이해하지 못하는 날보다
괴롭다 이해하고 싶지 않아도
내 이해는 나를 앞질러서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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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을 모조리 지켜낼 것이다.
백편이 넘는 영화를 봤고
겨울에는 할머니를 모시고 홋카이도에 갈 것이다.
때때로 구설을 자초했고
헛된 말들의 씁쓸함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모난 마음에 부러 남에게 상처주지 않았고
용서했고, 용서 받았고
또다시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으니까.
희망.
간신히, 그러나 또다시
희망!
정말 희망은 우리가 뿌리칠 수 없는
마지막 죄, 종신형의 형벌인가 보다.
202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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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써온 모든 글을 쓰면서 내가 바란 것이 있다면 더이상 글을 쓰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그저 그런 날을 살아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날들이 가능한 오래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런 날이 오면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만나서 미안하다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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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같은’의 핵심은 진짜가 아닌 같은 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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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사람은 깊은 상처를 준다.
진정한 치유는 아픔이 제 마음 속에 살다가 혼자 죽게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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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면 어떻게 살겠느냐
그다지 원하는 대로 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저 질문에 답을 할 수도 없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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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난 데 없이 무난한 작품보다는 눈에 띄는 단점이 있더라도 한 가지가 특출나게 좋은 작품을 오래 기억한다. 그럴 때가 있다.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이미지가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러다가 삶의 어느 시점에 어떤 영화를 보고 내가 기다려온 이미지가 바로 이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내게는 라스 폰 트리에의 이미지가 그렇다. 여자를 랜치로 두들겨패고, 칼로 젖가슴을 도려내고, 그것도 모자라 시체를 차에 매달아 질질 끌고 다니며 욕보이는데도 그의 영화를 싫어할 수 없는 이유. 단지 도달할 수 없는 천국에 대한 이미지를 구현해냈다는 그 하나로. 내 내면세계가 누군가의 작품세계와 데칼코마니처럼 맞아떨어지는 경험을 하면 그 안에 담긴 것이 아무리 추악해도 결코 미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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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고 끔찍한 것을 봤을 때 저어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좋은 신호인 것 같다. 무서운 것을 무섭게, 끔찍한 것을 끔찍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마음의 말초신경이 죽지 않고 제기능을 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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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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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만 말하는 것의 장점은 자신이 한 거짓말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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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rst hit is always the strongest.
you’re always craving to go back to that level of inten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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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드룸스 보고나와서 아버지랑 통화. 영화 보고 나와서 누구랑도 얘기하지 못하면 내안에 뭔가 서서히 죽어갈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만큼 심적으로 힘든 영화였다. 아버지에게 줄거리와 내가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얘기도 함. 아버지 말. 그 영화는 ‘고통을 구경하는 사회’에 관한 영화인것 같다. 다른 사람이 살인, 강간당하는 영상을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볼수있는 시대. 타인의 고통이 우리의 그릇된 욕망에 의해 흥미의 객체로 전락하는 사회에 관한 얘기. 그리고 결국 이 영화를 보는 관객도 그 고통을 구경하게 한다. 주인공을 보면서 비틀린 역겨움을 느끼지만 사실 우리도 다를바 없는. 아버지 요즘 나는 영화를 보고 이 영화에 대해 심도있게 얘기나눌 상대가 없는것이 슬프다. 대화를 통해 영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또 상대가 내가 못 본 것을 볼 수도 있지 않나. 영화 끝에 그런 경험이 없는 것이 못내 슬프다. 그럼 이렇게 언제든 전화해서 내게 얘기하면 되지 않나. 옥아 당분간 영화 보지 말아라. 불안해보인다. 아니면 밝고 아름다운 영화만 봐라. 불안한 사람에게 영화는 긍정적인 사유 수단이 아니다. 특히 이런 영화는 너가 정신 건강해지고 봐라. 또 아버지 추천작.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나오는 짐 쉐리단 감독의 1990년작 나의 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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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텍사스 (1984)
히로시마 내 사랑 (1959)
환송대 (1962)
당나귀 발타자르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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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다른 인간에게 한 짓을 통해 반성이니 성찰이니 내면의 성장이니 따위를 이룩했다고 진지한 표정으로 지껄이는 인간을 볼 때마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런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싸이코패스같다.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반성하는 사람은 결코 그것을 떠벌리고 다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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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대에 모럴리스트는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이다. 외계인이 인간을 보면 무얼 하겠나. 관찰하겠지.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도 없이. 인간의 내면이나 벌레의 내면이나 외계인 앞에는 동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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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종류의 야심도 없는 인간이라는 것은 내게 가장 큰 행운이자 다행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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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조금이라도 인과관계를 특정할 수 있는 불행이라면 나는 그 불행을 어느정도 선에선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잘, 그러니까 의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너무나도 우연 그 자체인 불행은 나를 너무 슬프게 한다. 가령 태어남. 조금의 필연성도 없는 이 밑도끝도 없는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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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덕배가 내게 주는 무한한 사랑과 위로.
한 번이라도 동물을 사랑하고, 동물에게 사랑받아본 사람은 사람과 사람간의 사랑이 대단치 않은 것으로 느껴진다.
인간은 자신만 동물을 가여워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동물도 인간을 가엽게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의 언어를 모르면서 무한히 가여워하는 것.
그것이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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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영화의 세계는 어렵다. ‘많이 안다’고 생각했을 때, 사실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포기나 좌절의 감정 보다는 평생에 걸쳐 푹 빠지고 싶다는 결심이 든다. 나는 무지하지만 여기에 평생을 두고 탐구해 볼만한 굉장한 것이 담겨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음악이나 문학의 역사에 비해 영화의 역사는 짧은 편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방대한 아름다움의 한 귀퉁이 정도를 간신히 들여다보는 수준에 그치겠지만. 그럼에도 즐겁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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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게는 죽기 싫어서 아무나 사랑하고 싶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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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의 반성, 성찰 뭐 그딴거를 위한 밑거름으로 기능하려고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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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숨은 당신
옷깃이 보여
이 사랑스런 어둠 속에는
아무런 틈이 없는데
/ 이장욱, 무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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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할 일이 명확한데 왜이렇게 하기가 싫을까. 밥 먹는 것도 귀찮아서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않고 커피 한 잔으로 때우는 날이 계속된다.
10/6
- 물류관리 과제 끝내기
- 밥먹기
- 인생의역사 한단원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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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초밖에 안됐는데 존나 춥고 나는 벌써 감기에 들어 골골거리고 있네. 아 늙은 몸이여. 여자는 서른 되면 상폐라 자살하는게 맞다. 자살 준비 착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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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 시 이해하는 사람과는 가능한 엮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응준 시도 이해 못하는 사람과는 무슨 대화를 할 수 있나 싶다. 자가당착. 이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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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해질녘에는 내 방에 빛이 차올라, 자몽색 벽과 그림자 인형이 생겨 나도 하나의 그림자로 기능한다. 방의 공기가 덥다. 일을 그만 둔 아침이면 잠에서 깨어 누워 있다가 이대로는 안 돼, 하며 느리게 몸을 일으키곤 했다. 바깥이 좋아 보였기 때문에 어디든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가 보려고 샤워를 했는데, 몸의 물기를 닦으며 왜 나가야 해? 어디로? 가서 뭐 해? 혼자? 생각하다가 나가지 못했다. 나가지 못하다가 지금이라도 나가야… 왜? 어디로? 반복했다. 그리고 누워 있었다. 관절이 부어 있었다. 그대로 잠드는 날이 계속되었다.
한동안 바깥이 필요하다, 나가고 싶다 라고 강하게 생각했고 그런데도 나갈 수 없어서 영화표를 끊었다. 옥이가 내 메모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걸 왜 지워, 옥이가 말했다. 다시 펜을 잡고 싶었다. 문써에게 내가 쓴 시들을 보여 줬다. 그냥 두면 파일일 뿐이잖아, 문써가 말했다. 시 10편을 모아 프린트했다. 그리고 다음 날, 문써가 나 대신 우체국에 가서 문사 신인문학상에 투고해 주었다. 7월 말일이었고 투고 마감일이었다. 한 달쯤 지나자 바깥이 필요하다, 나가고 싶다 라는 생각을 더는 참을 수 없게 되었고 조금씩 방 밖에 나가기 시작했다. 옥이 나와 함께 있었다.
나는 새로운 인간이 아니고, 내 목소리는 낡았다는 구렁텅이에 빠지곤 한다. 그래서 나 대신, 내 목소리만이 인쇄되어 있는 분명함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무너지는 내가 붙잡은 건 다 무너진다. 그렇지만 붙잡아도 무너지지 않는 게 있다. 계속 붙잡는 두 손이 있다면, 가능하다면. 조금이라도 닿고 싶다. 붙잡았다는 감각이 착각이라면, 가까이 가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경의선 철길을 걸었다. 공기에서 정말로 역겨운 밤꽃 냄새가 나서 구역질을 하며 걸었다. 밤꽃 냄새… 시부럴… 나 혼자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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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주말 끝나서 일 하고 싶다
일 안하면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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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무언가 결핍되면 평생을 그것만 생각하며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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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lp Fiction (1994)
좋은 화면의 정석과도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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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이 위대한 사랑이야기로 회자되는 것은 그 이야기에 담긴 사랑의 불가능성 때문이다. 잭과 로즈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결혼하고 자녀를 두고 늙어 죽는 세계에서도 사랑은 지속가능할까. 애인에게는 결국 사랑을 둘만의 권태에 의해서 죽이느냐 아니면 사랑을 지닌 채 애인으로 죽느냐의 양자택일밖에 남지 않는다. 잭은 사랑을 지닌 채 애인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토록 절절한 영원불멸의 사랑이야기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일한 주연 남녀배우가 출연하는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타이타닉과 정확히 반대 지점에서 죽어가는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사랑을 지닌채 죽거나 사랑이 이미 죽은 것을 인정하고 돌아설 용기가 없어서 주인공은 둘만의 권태로 서서히 사랑을 죽인다. 여주인공은 마침내 낙태기구를 사서 스스로 낙태하다 잘못되어 죽음을 맞는다. 카페트에 떨어지는 핏방울과 창밖을 바라보는 케이트 윈슬렛의 공허한 눈빛은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한다. 사랑을 지닌채 죽지 못하면 반대로 사랑이 사람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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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사랑은 사랑밖에 모르는 상태가 되는 것. 나는 이것밖에는 모르겠고 내가 원하는 것은 너와 함께 살다가 죽고싶고 너에게 너와 나만 아는 새로운 언어로 말하고 행동하겠다는 다짐같은 것.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서 나의 개성의 발전과 개인적인 완성을 포기하겠다는 것, 나아가 내 삶까지 포기하겠다는 것, 나를 너에게, 나의 삶을 너의 삶에 귀속시키겠다는 것. 스스로를 세상에서 예외시키고 나와 너 외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투쟁하겠다는 것. 나의 최고의 행복은 더이상 고유한 개성의 발휘가 아니라 상실에 있는 것. 나의 개성이 상실하다 마침내 소멸하여 너에 녹아들기 원하는 것. 실제로 내가 사랑이라 생각했던 사랑을 할 때에는 이런 태도를 견지하여 나와 상대를 착실히 망하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나이들어 적당히 타협하고 사랑에 있어서 지적이고 계산기를 두드리게 되었다. 누군가와 지속적이고 그럴싸한 관계를 맺을 수는 있어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내게 불가능의 영역이 된것 같다. 그러나 항상 그런 사랑을 갈망하고 최고로 치는 마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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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후회는 결국 존재에 대한 후회로 귀결된다. 그 끝에 찾아오는 달콤한 유혹. 너는 너의 의지로 모든 것을 끝내고 더이상 후회도 존재도 없는 세계로 갈 수 있어. 너의 힘으로. 그 유혹 앞에 나는 무기력하다.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생활법률 과제 끝내고, 책을 몇 자 읽다가, 한강 나만의 장소로 가 줄담배만 연거푸 피다. 하루종일 잠만 자고 싶다.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한 의식을 가질 수 없다면 의식을 꺼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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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망가져버린 느낌 또는 스스로를 불편해하는 느낌. 그럼에도 이따금 발작처럼 찾아오는 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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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섹스가 뭔지 모르겠다.
어렸을 땐 신비롭고 무서운 뭔가였고, 자라선 은밀하고 즐거운 뭔가였다. 그 즐거움은 육체적 즐거움과 더불어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정신적 즐거움을 포함했다. 더이상 어리지 않게 되었을 땐 섹스 안에 있는 고통이나 허무함, 심리의 지배구조와 이해관계도 보이면서 섹스는 더욱 복잡한 것이 되었다. 섹스하고 싶은 욕망과 그 욕망이 이루어지는 횟수가 늘어나면 섹스에 대해 더 잘 알게 될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수록 섹스에 대해 잘 알게 될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모르겠다. 거의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 나는 섹스에 대해, 내가 분명히 욕망하는 이 행위에 대해 이해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말한다.
남녀 성기의 결합인 사전적 의미의 섹스라면 나는 분명 섹스를 해왔고, 앞으로도 섹스를 하게 될 것이 맞는데 어째서 나는 섹스를 할때 종종 상대방을 이용해서 자위를 하는것 같다고 느끼는지. 서로의 살을 있는 힘껏 부딪고 더이상 가까울 수 없을 정도로 밀착하는 것도 모자라 상대의 신체부위를 내 신체에 밀어넣는데도 왜 나는 섹스가 아니라 자위를 하는 것 같은지. 상대를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고 성적 도구로 이용했다는 도덕적 죄책감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성적 쾌감의 정도나 오르가즘도 관련이 없다. 말로 포착하기 어려운 감정이지만 두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격렬한 결합에서 오는 가장 극한의 거리감과 허무함에 대해 말하고 싶다. 섹스는 결합인데, 결합은 불가능하고, 물리적이고 가시화된 결합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더욱 공허하다. 우리는 우리가 결코 결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왜냐면 그것은 결합을 원하는 두 인간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사실이므로) 그토록 반복적이고 집착적으로 성기를 결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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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이 쓸쓸한 순간은 누군가 나를 좋아해주지 않을 때가 아니라 내가 더이상 무언가를 좋아하지 않을 때, 좋았던 것이 더이상 좋지 않을 때.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나의 선호, 어색한 공기 앞에 나는 무기력하다. 왜 한번 사랑하기로 맘먹은 것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을까. 왜 사랑을 지켜내기가 이토록 힘들까. 왜 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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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울함, 공허함 사실 별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 갖고가는 감정이라는 것, 그러니 유난 떨것도 없고 지나치게 아파할 것도 아니라는 것 인지하고 할머니가 내게 말했듯 의연하고 담대하게, 우리 손녀딸 용기를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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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고깃덩어리 취급하면 망가지는 건 오히려 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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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원피스에 구두까지 신었는데 어울리는 가방이 없어서 나가기 직전 옷장을 한참 뒤졌다. 작고 귀여운 검정색 숄더백 하나를 발견해서 얼른 메고 나왔다. 하루종일 메고 다닌 후에야 근데 언제 산 가방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 택도 안 떼진 걸 보고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헤어지기 직전에 이재훈이 사줬던 가방이네 하고. 아낀다고 고이 모셔두고 한 번도 안멨네, 그러고보니 그애 앞에서조차 한번도 메본적 없네 하고. 내가 이런걸 까먹을 수 있구나 하고 스스로에 놀랐다. 조금 대견스럽기도 했다. 그래 결국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진다. 그 애, 그 애와 관련된 모든 것들, 이제는 꾸다만 꿈처럼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닌것 같다. 사람의 전생은 태어나기 전이 아니라 잊혀진 기억속의 시간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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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존 트라볼타는 우마 써먼 따먹기는 커녕 발가락 한 번 못 빨아보고 뒤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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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살것
-인덱스(꼭)
-포스터4장주문
- 가디건 오늘?
- 마스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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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 그 앞에서만 작동하는 나의 어떤 패턴이 생긴다. 또다른 나의 탄생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 나아가 그와의 관계에서 탄생한 새로운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별은 그만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에서 새롭게 탄생한 ‘나’를 잃는 것, 그와의 관계에서만 작동하는 ‘나’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사라지며 그 앞에서만 작동하는 ‘나’는 더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별에 대한 애도는 결국 그, 그와의 관계, 그리고 사라진 ‘나’에 대한 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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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영혼이 망가진 원인을 왜 남에게서 찾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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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부재 앞에서 사람은 비로소 추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부재의 추상성. 너무나 고통스럽고 당혹스러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통스러운 것. 그 감각 앞에서 사람은 추상을, 부재의 추상을 온 몸으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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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내가 이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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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나를 ‘옥아야’하고 불렀다. ‘옥아’도 아니고 ‘옥이야’도 아닌 ‘옥아야.’ 나를 옥아, 혹은 옥이야 하고 불렀던 사람은 많고 지금도 사람들은 나를 옥아 하고 부르지만 나에게 ‘옥아야’ 했던 사람은 할머니밖에 없다. 나의 슬픔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나의 슬픔은 그러니까 예견된 외로움 때문도 아니고 미래에 반드시 벌어질 어떤 구체적인 일 때문도 아니다. 그런 일들이라면 나는 어느정도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생각보다 나의 슬픔은 그렇게 깊은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그들에게 줄 수 있을 것 같다. 심지어 별일 아니라고 가볍게 웃어넘길 수도 있을것 같다. 내 슬픔이 미리 도착해있는 곳. 그 곳은 다른 곳이다. 누군가 나를 불렀던 단 하나의 이름이 사라진 곳. 그래서 더이상 아무도 나를 ‘옥아야’하고 불러주지 않는 곳.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름을 영영 잃어버리고 기억에 묻어둔 곳. 내 슬픔은 거기 가있다. 그 이름에 담긴 추억과 의미는 다른 이에게는 불가해한 것이므로 내 슬픔을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설명될 수 없는 것은 극복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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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절망의 밑바닥에서, 밑바닥의 밑바닥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 주변의 사람들을 울적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나 때문에 겁에 질리게 하지 않으려고 정말로, 정말로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 어쩔 수 없이 방심하는 순간이 오고, 자주 더는 그렇게 견딜 수 없어서 놓아버리는 순간이 오고 모든 것은 한순간에 허물어진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들을 겁먹게 하는 순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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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눈에 내가 무너져가는 걸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나 때문에 겁에 질리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남들이 나 때문에 겁에 질린다면 그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무너질 때마다 슬프고 겁먹은 눈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바라보는 가족들. 그들을 바라볼때 밀려오는 좌절감. 남들이 겁에 질리지 않을 정도까지만 무너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정말로 몰라.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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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이오 카피타노 3.0/5.0
8/3 백치들 3.5/5.0
8/5 행복한 라짜로 4.0/5.0
8/5 키메라 (재관람)
8/6 그린 나이트 4.0/5.0
8/11 천상의 몸 4.5/5.0
8/13 희생 (재관람 요망)
8/14 멀홀랜드 드라이브 5.0/5.0
8/16 에이리언: 로물루스 3.0/5.0
8/16 공포분자 4.0/5.0
8/18 앙젤리카의 이상한 사례 4.0/5.0
8/21 까마귀 기르기 5.0/5.0
8/23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4.0/5.0
8/25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3.5/5.0
8/27 한국이 싫어서 2.5/5.0
8/31 회로 4.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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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5.0/5.0
9/5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3.5/5.0
9/5 화양연화 4.5/5.0
9/7 아비정전 3.5/5.0
9/8 룩백 2.5/5.0
9/8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3.5/5.0
9/9 세 가지 색-블루 5.0/5.0
9/14 베테랑2 2.5/5.0
9/20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 4.0/5.0
9/20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5.0/5.0
9/21 눈 먼 짐승 3.0/5.0
9/25 세 가지 색-화이트 3.5/5.0
9/25 세 가지 색-레드 4.0/5.0
9/26 장손 3.0/5.0
9/27 독립시대 3.5/5.0
9/29 국외자들 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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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머니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이 말은 할머니가 나와 함께 이 세상에 계속 존재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사랑은 상대가 이 세상에 계속 살아있기를 원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소망이다. 동시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계속 살아가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결국 상대의 살아있음을 감각하는 나의 살아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와 상대가 계속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길 바라는 단순한 마음이다. 그래서 아주 하잘것없는 것일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죽을 수 없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사람은 순간 속에서 영원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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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상처에서 고개를 돌려.
그만큼 어떤 낭만은 비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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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떠난 뒤 혼자 남겨진 사람이 느끼는 빈자리는 그가 떠나기 전 그 자리에 있던 것의 총합보다 크다. 이는 수학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지만 감정적으로는 가능하다. 감정적으로 가능한 것. 감정의 논리.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건 언제나 이성이 아닌 감정의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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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9
내가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내가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단 한 가지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나는 안다.
그 점에서 나는 낭만주의자처럼 비춰지는 것같다.
꿈에 사는 사람,
그애가 종종 말하곤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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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5
사람은
기댈 사람이 없을 때가 아니라
힘들어도 굳이 기대고 싶지 않을 때
외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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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8
발설되었지만 진심이 아닌 것과
진심이지만 발설되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대부분의 사랑이 소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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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6
나의 행복은 행복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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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양면은 갖고 있을 테지만
내가 모르는 그 이면이
조금 덜 끔찍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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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충동이라는 당신 말
기억하고 있어요
충동이 없다면 죽은 거지
덧붙이던 작은 한숨 같던 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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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면은 통찰력의 결핍을 메꿀 수 있고, 실제로 그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정말 대단하고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근면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순간의 번뜩이는 영특함이나 통찰로는 얻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지혜도 분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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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는 언어적 콘돔이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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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라는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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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쓰는 글과 결이 맞는 사람이고 당신은 당신이 쓰는 글과 결이 맞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당신의 글이 싫어요.